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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Mar 07. 2023

어쩌다 보니 독일의 성동일과
영화 찍은 썰

독일 영화 촬영장의 분위기는 어떨까?

올해 생일, 나는 독일 영화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라는 첫 경험을 나 자신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오버하지 말라고? 맞다. 사실은 그냥 노느니 돈을 벌기 위한 선택이었다. 알바를 가기 전까지의 마음은, 정말 그랬다. 독일에 살고 있다고는 해도 독일 영화나 배우에는 원래 관심도 별로 없었다. 촬영장에 누가 오든 어차피 모르는 사람이라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감독 이름도 영화 제목도 구글링 한 번 하지 않은 채 촬영장으로 갔다. 그렇게 아무 기대도 없이 간 촬영장에 우리나라로 치면 성동일 배우님 정도 되는 배우분과 베를린 영화제에서 독립영화상도 받은 적 있는 실력파 감독님이 있었다. 촬영이 끝난 후 내 마음은 어떻게 변했을까? 

태어나 처음 도전하는 나의 첫 독일 영화 엑스트라 이야기. 




한국인 엑스트라를 찾습니다


시작은 이랬다. 2월 초, 좋아하는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독일 영화 촬영팀인데 한국인 엑스트라를 찾고 있다는 구인글이었다. 마침 일을 쉬던 차였는데 타이밍이 좋았다. 망설임 없이 지원하기로 했다. 지원 메일은 요즘 유행하는 ChatGPT로 써봤다(ChatGPT는 독일어도 잘한다). 생초보의 엑스트라 지원 이메일 치고는 너무 열정적으로 써줬길래 열정을 좀 덜어낸 후 메일을 마무리했다. 뚝딱 몇 분 지나지 않아 독일어 지원 이메일이 완성됐다. 신기했다. 다행히 연락이 왔다. 합격이었다. 이번만큼은 인종 차별이 아닌 인종 이득을 톡톡히 보는구나.



촬영 장소는 미리 고지되었지만, 시간은 촬영 전날 밤 10시가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독일이라고 다 모든 게 철저히 미리 계획되고 착착착 진행되는 게 아니라는 걸 또 한 번 느낀다. 다행히도 우려했던 살인적인 스케줄은 아니었다. 집합 시간은 오전 9시 15분. 그렇게 먼 곳은 아니라 촬영장까지 개개인이 직접 이동해야 했다. 1시간 정도 지하철을 타고 환승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누가 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나와 같은 엑스트라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왔는데 다른 분들은 이미 아는 사이인 듯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단은 조용히 그분들의 뒤를 따라 촬영장에 도착했다. 



엑스트라의 고생스러움을 한국에서 워낙 익히 들은 터라 걱정이 많았다. 제대로 된 대기실도 없이 아무 데나 서있으라고 하는 건 아닐까, 가방도 어디 구석에 쌓아두어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었다. 괜히 아이패드나 맥북을 들고 갔다가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일부러 챙기지 않았는데, 과한 걱정이었다. 의외로 한국인 엑스트라팀을 위한 대기실이 따로 있었고 짐 걱정도 크게 하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였다. 대기실에는 테이블, 의자도 있고 공간도 넉넉해서 각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여유롭게 대기할 수 있었다. 대기실에 앉아 지시 사항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주위 한국분들이 감독과 배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들렸다. 생각보다 유명한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오기 전에 감독의 이름이나 영화 이름을 미리 전달받기는 했지만, 원체 독일 영화에 관심이 없어서 봐도 모르겠지 - 싶어 검색도 안 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감독님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독립 영화상도 수상한 적이 있는 실력파 감독이었다. 구글에 검색하니 위키피디아에 감독에 대한 히스토리가 줄줄 나왔다. 우리와 가장 많이 촬영을 같이 한 남자 주인공 배우도 우리나라로 치면 성동일 배우님처럼 실력파로 인지도가 높은 배우라고 했다. 신기하면서도 신기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성동일님을 봤다면 신기해서 바로 대박을 외치거나 감동이 물밀듯 밀려들며 사인 받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을 것 같은데(평소 연예인을 만난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 여기서 만난 독일 감독이나 배우는 독일에서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평소에 알던 사람도 아니고 작품도 본 적이 없으니 말만 들어서는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배우와 감독의 첫인상


남자 배우는 처음 봤을 때 배우인지도 몰랐다. 우리가 촬영을 하던 날이 아역 배우 촬영도 있는 씬이라 3살짜리 어린 여자 아이를 촬영에 몰입할 수 있게 어르고 달래야 했는데, 옆에서 아이랑 눈 맞추고 놀아주고, 강아지 인형으로 실감 나는 개소리(?)까지 성대모사하던 남자분이 있었다. 아이랑 너무 잘 놀아줘서 그저 아이의 아빠인가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실제 아빠가 아니라 영화 속 아빠였다. 사실 찡찡거리는 아이를 달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고, 아직 본격적으로 촬영 시작 전이라 본인은 휴게실에서 쉬어도 됐지만 나서서 아이랑 놀아주는 모습을 보니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겨우 어르고 달랜 아이를 데리고 촬영이 시작되자 그때부터는 또 진지하고 프로다운 연기자가 되었다. 당시 촬영 씬이 아빠가 방으로 달려들어와서 아이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었는데, 달려들어온 직후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촬영이 멈춰있는 시간 동안에도 계속 제자리에서 뛰며 호흡을 거칠게 유지하는 모습도 멋있었다.


하지만 역시 배우는 배우였다. 촬영이 들어가자마자 확 변하는 분위기와 진지한 연기를 보니 그때서야 마음이 쿵 하고 반응했다. 한국에서도 드라마든 영화든 촬영 장소에 가본 적이 없어서 누군가 내 눈앞에서 연기하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어서 더 놀랐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제목이 ‘죽음(STERBEN)’인 만큼 스토리는 꽤 진지하고 심각했다. 그래서 ‘액션’ 신호가 들어가면 촬영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아무것도 없던 폐건물이 갑자기 생기가 가득한 공간이 된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공간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뜨겁게도 만들었다가 차갑게 얼리기도 한다. 이 팀이 프로라는 건 비단 비싸 보이는 장비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 일에 임하는 스태프들의 태도에서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몇 씬 정도를 찍었을까, 갑자기 어떤 남자가 촬영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왔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한눈에 감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에 언급했듯 감독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나는 감독의 얼굴을 전혀 몰랐다. 그가 입고 있는 옷도 다른 스태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회색 맨투맨에 어두운 청바지. 하지만 회색과 흰색이 뒤섞인 머리카락이 말하는 그의 나이가, 그의 등장만으로 한 순간 바뀌는 현장의 분위기가 그가 감독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Good morning



감독은 나를 포함한 엑스트라 팀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주었다. ‘원래 감독님이 엑스트라한테 이렇게 인사도 해주나?’ 잘 모르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장은 이미 두세 번 정도 액션이 들어간 상태였고(아마도 감독은 모니터가 있는 방안에 있다가 나온 듯했다), 바로 주연 배우에게 가이드를 주러 가도 전혀 상관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인사 하나가 이렇게 중요하다. 나는 비록 인사를 먼저 못하는 소심쟁이이지만, 먼저 건네는 인사에는 분명히 강한 힘이 있다는 것에는 매우 동의한다. 그냥 지나쳐도 되었을 우리에게 건넨 짧은 인사 하나로 그는 그냥 감독님에서 ‘인성 좋은 감독님’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도 배우가 NG를 반복해서 답답해하는 모습이나(대사가 있는 엑스트라 배우가 있었는데 대사를 계속 틀렸다) 원하는 샷이 나올 때까지 찍고 찍고 또 찍는 모습에서는 인간적이기도 하고 작품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잘했어’ 대신 ‘고마워’


“Set(쎗)”

“Set”(쎗)

“Set”(쎗)

“Und Bitte(운… 비테)”



내가 아무리 영화 촬영일을 몰라도 한 가지 한국과 분명히 다른 점은 알 수 있었다. 바로 영화 촬영 시 사용하는 사인이다. 드디어 “레디 ~ 액션!”을 실제로 들어보는 건가 싶어 두근두근 기대했는데, 독일이라 그런지 사용하는 용어가 좀 달랐다. 일단 촬영할 준비가 되면 조연출이 “곧 촬영 들어간다”는 의미로 “Kurz davor”라고 한다. 직역하면 “(촬영 들어가기) 직전입니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면 곳곳에서 “Set”, “Set” 하는 소리가 들린다. Ready 대신 쓰는 사인으로 “세팅 완료”라는 의미다. “Set” 소리가 세 번 정도 들리면, 조연출이 “und… bitte!”라고 말한다. ‘und’은 영어의 ‘and’과 같고, ‘bitte’는 영어의 ‘please’와 같다. 직역하자면, “그럼 부탁합니다”라는 뜻이 되겠다. 처음 몇 번은 “액션(Action)” 사인도 썼는데, 나중에는 계속 “Bitte”를 사용했다. 아마 사람에 따라 쓰는 사인이 다른 걸지도 모른다. 독일어는 말하는 투는 좀 투박하게 들릴지 몰라도, 사실 언어 자체에 매너가 숨어있다. 우리나라말로는 저런 상황에서 “부탁합니다”라는 단어만 사용하는 것은 어색하다. 만약, 액션이라는 영어 단어를 쓰지 않고, 한국말로 한다면 ‘시작’이나, ‘들어갑니다!’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그런데 ‘부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참 괜찮구나 싶었다.


함께 일하는 스태프끼리 쓰는 말도 자세히 관찰해 보니 좀 다르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었다. 마지막 씬에서 바퀴가 달린 몸체 위에 커다란 카메라와 의자가 있는 장비를 썼다(이름을 물어볼 걸 그랬다). 건장한 사내에 투박한 카메라까지 올라가 있어 꽤 무거워 보였다. 이 장비로 촬영을 하기 위해서 두 명의 스태프가 한 조로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한 명은 카메라를 직접 잡고 각도를 맞춰 촬영을 하고, 다른 한 명은 허리를 숙이고 그 장비를 밀며 카메라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역할이었다. 세밀한 동선을 위해 장비에는 바퀴를 움직이는 핸들까지 붙어있었다. 출발 지점부터 도착 지점까지는 눈에 띄는 빨간색, 검은색 테이프를 바닥에 붙여 표시했다. 보기만 해도 꽤 힘들어 보이는 작업. 카메라를 잡고 장비 위에 앉아있는 스태프는 온 힘을 다해 장비를 밀어주는 스태프에게 한 번의 동선이 끝날 때마다 ‘Danke(당케)’, 즉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이 매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느낄 수도 있는 일인데, 매번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그냥 특별한 고마움의 표현이 아니라 몸에 베인 자연스러운 표현 같았다. 우리나라였다면, ‘오케이’, ‘굿’, ‘좋아요’ 정도로 표현했을 것 같다고 상상했다. 미묘하지만 느낌이 다르다. 저런 상황에서 ‘고맙다’고 말하는 건 둘의 관계가 평등하게 느껴지거나 또는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대신 ‘굿’, ‘좋아’, ‘오케이’ 같은 표현은 잘했다는 칭찬의 뜻이지만 그 속에 상하관계가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독일이라고 직장에서 상하 관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 경험상으로도 한국에서 일할 때보다 상사나 동료로부터 ‘고맙다’는 표현을 더 자주 들었던 것 같다. 으레 하는 말이라고 해도 나는 ‘잘했다’는 말보다 ‘고맙다’는 말이 더 좋았다. 



한국의 성동일 배우급의 유명한 실력파 배우와 어떻게 보면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한국인 엑스트라들이 모두 다 똑같이 대접받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분명 주연 배우나 메인 스태프들을 먼저 챙기는 분위기는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엑스트라, 게다가 이방인인 엑스트라를 무시하는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반대로 오지랖 넓은 한국인들이 좀 귀찮을 수도 있는 상황도 몇 번 보았는데 성격 좋게 다들 잘 받아주었다. 사진의 민족이라 셀카 찍자는 사람도 제법 있었고, 영화 세팅이나 연기 방법에 대해 이것저것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도 몇몇 있었는데, 대부분 수용하는 분위기였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했지만, 내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을 잘 관찰하는 시간이었다. 독일 회사 하나 다녀봤다고 독일의 일 문화를 다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런 분야도 저런 분야도 경험해 보고 싶었는데 영화 촬영장의 경험은 제법 큰 공부가 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오늘의 이 경험이 앞으로의 다양한 도전에 작은 불씨가 되어줄 것 같다.






감독 소개 


Matthias Glasner, 독일의 영화 감독. 1987년 Requiem이라는 영화를 시작으로 거의 매해 꾸준히 다양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Der freie Wille(자유로운 의지)'라는 네번째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 예술 영화상을 수상했다.



배우 소개


Lars Edinger, 1976년생, 독일의 영화 배우. 우리나라로 비교하면 성동일 배우 정도로 유명한 실력파 배우라고 한다. 베를린에서 오랜 시간 앙상블 멤버였다가 2009년 'Alle anderen'이라는 영화를 통해 영화 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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