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 유럽 일기
#1 연말 여행
어제 아침 운동을 하고 집으로 오는데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서는 이웃과 마주쳤다. 덴마크 교외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같이 사는 여자친구와 키우는 반려견을 데리고 조용히 하지만 재밌게 (짐 사이로 핑크색 가발이 보였다...ㅋㅋ) 다녀올 거라고 했다. 거기는 불꽃놀이를 안하냐고 물었더니, 그러길 바란다며 웃었다. 언젠간 나도 자리잡고 돈을 벌면 연말엔 불꽃놀이 소리가 안들리는 조용한 곳으로 여행을 꼭 가고 싶다고 마음 속 어딘가 버킷 리스트에 적어두었다.
#2 쇼핑 쇼핑, 쇼핑
나는 단지 참기름을 사기 위해 시내로 나간 것 뿐인데, 어느 순간 내 손에 들려있는 무인양품 머플러. 심지어 두 종류나 사버렸다. 지난 몇 년 동안 써오던 목도리가 올해 유난히 불편하게 느껴진 것은 내가 예민해진 탓일까 아니면 쇼핑을 하고 싶어서 또 다른 내 자아가 만들어 낸 핑계일까. 아니면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과 여기저기 Sales를 외치고 있는 상점들 때문일까? 그래도 한 목도리 7년 썼으면 오래 쓴 게 아니겠냐며 나 자신을 토닥여 준다. 새로 산 머플러는 패딩 재질이라서 내가 요즘 자주 쓰는 모자 (이것도 새로 산 무인양품 꺼)랑 역시나 한 5년 째 입고 있는 검은 롱패딩과 아주 찰떡이다. 만족.
#3 단시간에 자존감 최고로 올리는 법
그것은 바로 바로 연말에 남들 놀 때 도서관 가서 공부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 학교 도서관도 크리스마스부터 연초까지는 문을 닫는다. 다른 대학교 도서관도 보통 그렇다. 하지만 우리 도시에서 가장 큰 시립 겸 함부르크 대학 도서관은 실베스터(Silvester, 12월 31일), 뉴이어즈데이(New Year's Day, 1월 1일)만 빼고는 밤 12시까지 문을 연다. 그래서 부랴부랴 짐과 가벼운 저녁 거리를 챙겨서 도서관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참기름 사고, 무인양품 사면서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 계획대로라면 늦어도 오후 3시에 도착했어야 하건만 도착하니 5시. 그래도 무수한 방해를 헤치고 결국엔 기어이 도서관을 왔다.
위에 적었듯 오는 길에 쇼핑 하느라 2시간 넘게 시간을 썼고, 게다가 하필 시위가 있어서 평소 다니던 교통 수단을 이용하지 못하고 좀 둘러 가야 했다. 그냥 집에 갈까 생각도 들었지만, 무겁게 이고 지고 나온 가방과 저녁거리로 산 빵이 아까워서라도 도서관으로 진격했다. 대신 계획보다 더 늦게까지 공부! 아주 오랜 시간 미뤄오던 두 가지 과제를 마무리 하고 속이 시원해짐과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뿌듯한 성취감이 퐁퐁 솟아올랐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 뿌듯하진 않았을 일인데 12월 30일에 했다는 것이 나를 더 뿌듯하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도 연휴에 도서관을 종종 찾아 자존감을 올려줘야겠다. 연말 공부야말로 자존감 가성비 시즌이 아닐까 싶다.
글, 사진: (c) 노이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