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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Jan 03. 2024

독일 빌런 이야기


드디어 독일 영화관에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신작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 인가'가 개봉을 했다. 이것이 하야오 감독의 힘인 건지 다른 아시아 영화에 비하면 아주 빨리 개봉이 된 편이고, 예술 영화관도 아닌 대중적인 영화관에서 상영을 시작했다. 검색해 보면 1월 4일부터 개봉예정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오늘 봤으니 최소 이틀은 빨리 개봉한 셈이기도 했다. 다행히 지인이 표를 빨리 예매해 주셔서 뒷자리에서 봤는데, 앞자리 까지도 꽤 사람이 꽉 들어차서 거의 매진이었다. 


원체 지브리 애니를 좋아하기도 하고, 게다가 지브리 애니를 영화관에서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제법 두근두근 기대를 하고 갔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의 1/3은 집중을 제대로 못한 것 같다. 문제는 바로 옆 자리에 앉아있던 두 명의 독일 남성이었다. 처음부터 느낌이 조금 싸하긴 했는데, 어찌 싸한 느낌은 틀린 적이 없는지, 이 둘은 영화 내내 잡담을 시시때때로 나누었다. 자기들 딴에는 작게 말하는 거라고는 해도 바로 옆에 앉은 나와 또 내 옆에 앉은 지인에게까지 아주 잘 들렸다. 어쩌다 한 번 이야기 나누면서는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둘은 거의 대사만 없어지면 수다를 시작했다. (나중에는 대사 없는 장면이 나오면 '이제 슬슬 얘기를 시작하겠군' 하고 예측까지 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놓고 쳐다도 보고 헛기침도 해보았지만, 독일에서 이미 저런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건 잘 통하지 않는다. 이런 바디랭귀지가 통할 사람들은 애초에 저런 행동을 안 한다. 그렇다. 빌런이다. 당연하게도 독일에도 빌런이 있다. 보통 신기한 이야기, 좋은 이야기를 여기에 적으려고는 하지만, 오래 살다 보니 간혹 빌런을 겪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이었다.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나 조용히 해달라고 직접 말하고 싶었지만, 세 가지가 나를 가로막았다. 첫째, 이런 얘기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인프피적 내 기질. 둘째, 만약에 대화가 길어지면 어버버 하게 될게 뻔한 나의 독일어 실력. 셋째, 이들의 문화에서 이것이 용인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즉,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래도 영화 시작 전 안내 영상에서 '영화가 시작되니 이제부터 이야기하지 마세요'라는 멘트는 나온 걸 보니 이야기를 안 하는 게 매너는 맞는 것 같다. 그리고 떠든 사람보다 조용히 본 사람이 훨씬 많으니 이게 일반화의 오류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저, 내가 운이 없었을 뿐. 하지만 빌런은 빌런이니까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1월 1일 이후 밖에 나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폭죽의 흔적들 (이미지 출처: 본인)




특히, 가장 어려운 것은 세 번째이다. 여태껏 독일에서 살면서도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가 민폐로 받아들여지고, 어느 정도가 말해도 괜찮은지, 어느 정도가 용인되는지 명쾌하게 알기가 너무 어렵다. 내가 겪은 빌런들은 대체로 이랬다. 영화관에서 내 뒤에 앉았던 발냄새 빌런 (내 의자 위에 신발 신은 발을 올리고 영화를 내내 봤는데 발냄새에 질식될 뻔), 수영장에서 라인에 이미 서있는 사람 신경도 안 쓰고 다짜고짜 돌진해서 냅다 물 왕창 튀기며 접영 하던 빌런(옆라인에 서있던 나는 조금 피해를 입었다면, 같은 라인에 있던 여자분은 대놓고 무시당한 건데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다른 라인으로 옮겼다), 새해 첫날되면 길에서 신나게 폭죽 터뜨리고 하나도 안 치우고 쓰레기 내버려 두고 가버리는 빌런들, 학교 강의실에서 수업 시간 내내 속닥속닥 수다 떨던 여학생 빌런(교수가 두 번 정도 주의 줬는데 그때만 잠깐이고 진짜 수업 시간 내내 수다 떨었다. 출석 의무 수업도 아니었는데 왜 굳이 강의실에 앉아서 떠드는지 이해가 안 갔음). 


그런데 내가 마지막 속닥속닥 빌런을 겪었을 때 수업이 끝나고 다른 독일인 친구에게 이 얘기를 했는데 그 친구가 공감을 못했다. 그때는 내가 예민 빌런이 된 기분이었다. '물론 내가 좀 예민한 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공감을 못해준다고?' 근데 생각해 보니 그 주변에 다 그냥 조용히 수업 들었다. 나만 헛기침하고... 그리고 교수님도 그 정도로 계속 이야기하는데 정중하게 두 번만 주의준 것도 이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빌런은 학교에서 시험 다 보고 시험 시간 끝나서 다들 시험지 제출하고 나가는데 어떤 학생이 자기 덜 풀어서 집중해야 되니까 시끄럽다고 좀 조용히 나가달라고 소리치는 빌런도 봤다. 애초에 시험 시간 끝났는데 풀고 있는 것부터가 부정행위감인데 당당하게 외치는 그 모습이 어이가 없었는데 아무도 아무 말을 안 했다. 


이러하다 보니 좋은 영화 보고 나와서 영화 얘기 보다 독일의 공공장소 에티켓에 대해서만 더 열띤 토론을 한 것 같다. 결론은 여전히 어렵다는 것이고, 또 공공장소에서의 매너라는 것도 '상대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누가 봐도 비매너인 행동이 있고, 어떤 문화권에서는 '그 정도쯤이야' 라거나 '불편은 하지만 별 신경 안 써, 저 사람 자유지'하고 용인되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속으로는 싫지만 굳이 입 밖으로 잘 꺼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그리고 그런 행동을 보고 받아들이는 사람들 개개인의 기준도 다를 수 있다. 


반대의 경우인 적도 있었다. 학생 식당에 자리가 너무 꽉 차서 겨우겨우 친구들과 앉을자리를 찾았다. 다 먹은 사람들이 챙겨서 일어나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 일행이 아닌 다른 사람이 우리 앞에 서서 똑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내 독일인인 친구가 눈짓, 손짓으로 대충 '우리가 먼저 왔잖아. 저 옆에 자리 있네. 저기 가면 되겠네' 이런 뉘앙스를 취했더니 조용히 또 그리로 갔다. 나는 그냥 사람이 많으니 정신없어서 자기가 먼저 온 줄 알았나 보지 생각했는데, 내 친구는 내게 귓속말을 하며 '아니 자기가 늦게 와놓고 왜 저렇게 뻔뻔하게 서있냐'며 흉을 봤다. 이 경우는 오히려 난 별로 민폐라고 생각을 안 했는데, 독일인 친구가 그렇게 느낀 경우였다. 


 물론 지금 내가 말하는 내용의 그 어느 것도 독일의 문화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아직도 너무나 케바케고 사바사고 간단히 정의 내리기가 어려운 그런 곳이 바로 독일이 아닐까 한다. 또 꼭 독일 사람이 아니라고 다른 외국인이 위에서 내가 겪은 일을 똑같이 겪었을 때, 그들에게는 저 사람들이 딱히 빌런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어렵다. 해외에서 산다는 게 언어도 언어지만, 이런 게 참 어렵다. 무엇이 괜찮고, 무엇이 괜찮지 않은 건지 언제쯤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라서 그래도 이해는 못할 것 같다. 영화관에서 이런 일을 한 번만 더 겪으면 난 그냥 독일 영화 관람 문화랑 안 맞나 봐 하면서 영화관을 포기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추신. 영화가 끝나고 퇴장하는데 퇴장문 열어주는 직원이 짝다리 짚고 한 발로 문을 고정시켜 열고, 한 손으로는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뭐라고 하는 독일인 관객은 아마 거의 없을 것 같지만, 한국이었다면 좀 다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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