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는 우울한 전쟁 같았던,
새해 첫날

by 노이의 유럽일기



글을 쓰는 지금을 기준으로, 독일은 아직 새해 첫날이 2시간이 남았다. 2024년 갑진년의 첫날인 오늘, 나는 잠을 아주 푹 잤고, 아주 잠깐이지만 부슬비를 맞으며 달리며 운동을 했고, 간단히 점심을 먹고 카페로 갔다. 오늘 같은 날 독일에는 문 여는 곳이 많이 없고, 거의 365일 여는 가장 큰 도서관도 문을 닫는다. 이런 날에 앉아서 끄적이려면 카페 뿐이다. 마침 도장 10개를 다 모아서 무료 음료 쿠폰이 생긴 에스프레소 하우스로 갔다. 원래도 손님이 많은 곳이지만, 오늘 같은 날은 더 늦게까지 북적인다. 문을 연 카페가 많지 않기 때문일 거다. 줄이 길었지만 오랜만에 god 노래를 들으면서 기다리니 기다리는 시간도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쿠폰을 쓰려고 카페앱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오늘 한정 쓸 수 있는 카페라떼 50% 할인 쿠폰이 있었다. '어디 보자... 카페라떼 작은 사이즈가 4.40유로 니까 2.20유로? 괜찮은데?' 무료 음료 쿠폰은 다음을 위해 아껴두기로 하고 카페라떼에 우유 대신 두유를 주문했다. 학교 카페에서 이렇게 주문하면 추가 금액이 붙어서 여기도 붙을 줄 알았는데 처음 계산한 가격 그대로 2.20유로였다. '아싸!' 신나는 마음으로 두유 라떼를 받아들고 테이블을 찾아 구석구석 헤맸다. 다행히 구석진 곳에 한 자리가 비어있어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따뜻한 라떼 한 잔을 비우고, 아이패드를 펼쳐놓고 새해 목표를 생각하던 중, 문득 어젯밤 2024년 1월 1일 0시 0분이 될 때의 순간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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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는 실베스터(독일을 포함한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을 Silvester라고 부른다)부터 종종 '뻥!'하고 마치 폭발이 일어난 것 같은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바로 불꽃놀이를 하고 싶어 엉덩이가 근질근질한 사람들이 터뜨린 불꽃소리다. 시민들이 도시 곳곳에서 자기가 산 불꽃을 마구 터뜨린다. 지인의 지인은 불꽃놀이에 진심이라 매해 10만원에서 20만원씩 자비로 폭죽을 사온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마음껏 터뜨리는 시간은 당연 새해가 되는 1월 1일 00시 00분이다. 정각이 되면 난리 난리 이런 난리가 없다. 굳이 사람 많은 번화가를 찾아나가지 않아도, 집 창문에서도 여기저기 불꽃이 잘 보인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이 관습이 싫었다. 나는 원체 소리에 민감한 사람인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폭탄 소리 같은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는 것도 짜증이 났고, 술취한 주정뱅이가 장난을 친 건지, 아니면 누가 잘못 누른 건지, 새벽 1시에 누가 우리집 벨을 눌러서 좀 무서웠던 기억도 있다. 고맙게도 그 때 같이 불꽃놀이를 하자고 불러준 한국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 때는 겨울 우울증이 심할 때라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게 어려워 집에 혼자 있었다. 그렇게 꼬여버린 나의 실베스터 추억 때문에 한동안 실베스터는 내게 스트레스였다.


개인이 사서 터뜨리는 각종 요란한 폭죽은 그 소리도 다양한데, 진짜 전쟁이 일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소리를 내는 폭죽들도 많아서 반려 동물을 키우는 집들은 안정제를 준비하기도 한다. 철없는 10대들은 쓰레기통에 폭죽을 넣고 터뜨리기도 하고, 어두운 곳에 폭죽에 불만 붙여놓고 사람은 도망가서, 거기에 폭죽이 있는 줄 모르고 지나가다가 갑자기 터지는 소리에 놀란 적도 있다. 여기는 우리나라처럼 가로등을 환하게 켜지도 않기 때문에 그림자라도 지면 정말 보이질 않는다. 그냥 한국 부모님집에서 따뜻한 이불 덮고 누워서 연말 시상식 보다가 제야의 종소리 듣고 잠들던 그 때가 그리웠다.


그래서 작년에는 일부러 파티하는 곳을 찾아갔다. 다같이 카운트다운을 하고, 건배를 하며 맞이하는 새해는 즐거웠다. 그래서 올해도 또 사람들과 보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12월의 3분의 2를 보내고 나니 소셜 에너지가 바닥이 났다. 올해는 감사히도 실베스터에 초대해 준 분들이 제일 많았는데 모두 거절 의사를 밝히기까지 고민이 길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맞이한 2023년의 마지막 밤, 아니 2024년의 첫번째 밤이 왔다. 늘 그랬듯 미친 듯이 시끄럽겠지만, 이제는 내게 에어팟 프로가 있으니 노이즈 캔슬링으로 막아주겠노라 대비하고 있었는데, 막상 폭죽이 터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내 감정이 의외로 괜찮았다.



Video by noeyway



나는 분명 7년 전 그때처럼 같은 집에서 혼자서 이 폭죽놀이를 보고 있는데, 그때는 무섭고 외로웠던 내 마음이, 오늘은 따뜻하고 신났다. 창문을 열고 창가에 앉아 한참동안 터지는 폭죽을 보며 길거리에 나와있는 사람들과 함께 웃었다. 영상을 찍고, 사진도 찍다가 너무 우리집 코앞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집에 불똥이라도 튈까 무서워서 창문을 닫고 또 한참을 봤다. 이상하다. 왜 올해는 이 불꽃놀이가 싫지 않았을까.


곰곰히 생각해봐도 역시 바뀐 건 내 자신, 더 정확히는 나의 마음 상태 뿐이었다. 조금도 바뀌지 않고 매해 반복되어 온 같은 풍경, 같은 상황 속에서 내 마음이 어떤 렌즈를 끼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보였던 것 뿐이구나. 7년 전의 나는 고독이 아니라 외로움에 젖어있었다. 그래서 친한 사람들끼리 하하호호 모여 떠들며 즐기는 폭죽놀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외로움이 더 사무쳤던 것이다. 마음은 불안하고, 자존감은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내가 살아온 삶을 똑바로 볼 수 없었던 시절. 연말은 해낸 것이 없(어 보이)는 스스로를 자책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으니까. 밥 대신 초콜릿만 먹고, 운동은 일절 하지 않고, 게임 속으로 도망가 현실을 회피하던 시간들. 그런데 올해는 혼자인데도 외롭지 않았다.



이런 게 고독을 즐기는 것이구나


밥도 요리해서 건강하게 잘 챙겨 먹고, 그 때와 똑같은 게임을 했는데도 현실을 회피하는게 아니라 그냥 즐길 수 있었고, 한 해가 가기 전 마무리 하고 싶었던 짤막한 과제들도 마무리 하고,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도 불꽃놀이를 진심으로 즐겼다. 단 몇 분 간 느낀 이 변화만으로도 올해는 2023년을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떠나가는 한 해가 아쉽지 않고, 다가오는 한 해가 설레이는, 지금 이 감정이 내가 살아온 2023년이, 아니 지난 몇 년이 값진 시간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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