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일상 스케치
8월 13일 화요일
“아빠, 여름은 언제 와요?”
“아들아, (눈물을 그렁이며) 넌 함부르크에 살고 있단다.”
함부르크의 날씨를 풍자한 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밈이었다.
함부르크는 정말 여름이 없을까?
기본적으로 독일도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있고 그중에 여름도 있다.
함부르크도 여름이 있긴 있다.
그게 좀 드문드문할 뿐이다.
오늘은 여름이 온 날이었다. 날씨가 화창했다. 근데 평소의 함부르크 여름과 달리 공기가 꽤 습했다.
‘아니 이건 한국…?’
함부르크 길을 걸으며 한국 여름을 느끼는 기분이 묘했다. 매해 조금씩 다르지만 확실히 한국 여름에 비하면 여름이 없다시피 하다고 느낀다. 한국이 연신 30도를 웃돌 때, 함부르크는 어쩌다 하루 이틀 30도를 넘는다. 31, 32도만 되어도 ‘우와 내일 엄청 덥네!’ 하고 더위에 대비하는 편.
다른 날은 그저 조금 더 따뜻한 봄날씨 같은 느낌이다. 흐리고 비 오는 날도 있지만, 여름에 내리는 비는 대부분 금방 그친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세찬 소나기가 자주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나는 과거를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내 기억을 백프로 신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번에 분명하게 배운 건 다음부터 그런 비가 오면 우산이 있다고 해도 웬만하면 지붕 있는 곳으로 피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괜히 호기롭게 걸었다가 우산 아래가 홀딱 다 젖어버리는 수가 있다.
위에 소개한 밈처럼, 함부르크에는 여름이 없다는 걸 슬퍼하거나 불평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나는 함부르크의 여름이 좋다.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었을 때도 대부분 공감받지 못하지만 나는 좋다.
너무 덥지 않고, 너무 습하지도 않고, 진짜 딱 좋은 여름 날씨. 조금 아쉬운 건 짧은 여름옷을 입기엔 쌀쌀할 때가 많아서 (더위도 잘 타는데 추위도 잘 타는 몸) 좋아하는 여름 스타일을 마음껏 못 즐기는 것은 좀 아쉽다.
8월 14일 수요일
오늘은 오전부터 병원에 갔다가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9시 30분 예약을 잡았더니 전보다 30분 일찍 예약을 잡은 것뿐인데 대기가 훨씬 줄었다. 처음에는 그냥 운 좋게 사람 없는 날에 온 건가 생각했는데, 10시가 되자 환자가 북적였다. 다음에도 30분 정도는 일찍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병원에 간 목적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약 하나를 재처방받아야 했고, 또 하나는 피부과 예약을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요즘 주사형 약을 처방받아서 매주 투여하고 있는데, 이런 게 처음이라 첫 번째 주사액의 공기를 빼다가 실수로 액까지 다 빼버렸다. 이 경우 보험에서 약값 커버가 안되고 내가 다 본인부담을 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한국도 그렇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약을 잃어버리거나 한 적이 없어서 전혀 몰랐다. 차이가 있다면, 보험 커버 범위가 독일이 더 커서 체감상 내는 금액이 더 올라간다. 전에는 한 개 5유로였던 약을 25유로에 한 번 더 사게 생겼다.
피부과 예약도 쉽지가 않다. 지속적으로 피부과 전문의에게 모니터링을 받아야 하는 상태라 예약을 계속 시도했는데 혼자서는 예약이 어려웠다 (독일 전문 병원은 신규 환자를 잘 안 받는 경향이 있다). 발품을 팔아 사정하는 게 아니면 어려운 듯했다. 이번에 피부과를 알아보며 느낀 거지만 여기도 레이저 시술이나 피부 관리 등 돈 되는 시술에 상당히 투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자리를 구하기 더 힘든 것만 같아서 좀 분했다.
그래서 약 처방받으러 간 김에 담당의사에게 대신 예약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몇 주 전에 의사가 내게 먼저 물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안된다고 했다. 전에는 괜찮다고 하더니 왜 그런 것이냐 물어보니 그 일을 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직원이 그만뒀다는 것인지 아니면 휴가를 간 것인지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일하는 직원의 수가 너무 적어 일을 늘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나름 혼자서 해보려고 애를 쓰다가 너무 안돼서 부탁하는 입장이라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서 한 번 더 부탁했더니 일단은 들어주었다. 통증이 없는 병이라 다행이라 해야 할지.
8월 15일 목요일
“내가 살고 있는 집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기분이 어떠세요?”
이제 곧 한국에 들어간다. 집이 비어있는 기간 동안 우리 집에 머무를 손님들이 오늘 도착했다. 손님에게 열쇠를 건네주고 대략적인 집 소개를 해준 뒤 저녁 약속에서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곧장 오늘 나의 일과를 이야기했더니 저런 질문을 해왔다.
독일에서는 이렇게 누군가 살고 있는 집에 단기간 머무르는 경우가 많은데 줄여서’ 쯔비쉔’이라고 말한다. 한 달 정도의 짧은 기간은 집주인에게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다. 특히 지금의 내 경우처럼 거주자가 출장이나 장기 여행 등을 이유로 집을 비우게 될 경우에는 이렇게 다른 사람을 받는 일이 흔하다. 독일에서는 너무 많이 겪은 일이고, 익숙해진 일이라 별 생각이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던 기억이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이런 식으로 한 달 전후의 단기 손님들을 여러 번 받아보았던 경험이 많다. 다행히도 이상한 사람이 온 적은 없다. 조금 특이한 사람은 종종 있었지만, 그마저도 경험이고 공부가 되었다.
보통 쯔비쉔으로 들어오는 분들은 어학 준비나 유학 준비를 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여행객을 받았다.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 살다가 한국에 들어가기 전 유럽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랜만에 다른 나라에서 사는 이야기, 다른 나라 여행 이야기 등을 들으니 재미있었다.
사실 이런 쯔비쉔을 아무 걱정 없이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사는 개인 공간에 들어오는 사람도 세놓는 사람도 서로가 어느 정도의 불안과 리스크를 감수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도 아들러가 말했다. 타자 신뢰가 중요하다고. 그래서 나는 그냥 믿는다. 좋은 사람들이 또 올 거라고. 그리고 좋은 사람들이 왔다.
8월 17일 토요일
여기서는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일이 아주 익숙하다. 마트가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내가 알바를 하는 가게에서도 손님들이 구매한 물건을 자기가 가지고 온 가방에 담아 가는 일이 많다. 그래도 나는 종종 빳빳한 새 쇼핑백에 쇼핑한 물건을 담을 때의 쾌감 같은 걸 느끼곤 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쇼핑백을 쓰는 일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 까다.
함부르크에 살게 된 이후로 나도 늘 에코백을 하나쯤 가방 안에 챙겨 다니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행여 어쩌다 에코백을 가지고 오지 않은 날에는 마트에서 종이 가방이나 에코백을 구매하는데, 오늘이 그랬다. 손바닥보다 작은 박하사탕 하나 살 겸 산책 겸 나와 BUDNI에 들렀는데 어느새 바구니가 한 손으로 들기 무거울 만큼 가득 차버렸다.
오늘은 하루 종일 청소만 하다 잠깐 나온 거라 에코백을 챙겨 나오는 것을 깜빡했다. 이럴 때면 에코백을 살까, 종이가방을 살까 늘 고민을 하게 된다. 에코백은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지만, 아무래도 종이가방보다는 가격이 비싸다. 가게마다 다르지만 보통 1유로가 넘는다. 게다가 너무 에코백을 많이 사도 집에 쌓이면 짐이다. 종이 가방은 20-50센트 선으로 더 저렴하지만, 여러 번 사용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고 여러 번 쓸 수 있다고 해도 평소에 가지고 다니기 거추장스럽다.
그래서 나는 어쩌다 한 번 이렇게 에코백 챙겨 나오기를 깜빡한 날이면 적절한 비율로 에코백과 종이가방을 섞어서 산다. 보통 고르는 기준은 가격과 디자인이다. 에코백이 좀 디자인이 괜찮으면 구매 확률이 올라간다.
물론 마트 에코백에서 뭐 대단한 수준의 디자인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 나름의 매력 있는 마트 에코백들이 종종 있다. 자주 가던 마트였던 Real이 그랬다. 함부르크에 놀러 왔던 친구들도 기념 삼아 하나씩 사갔었다. 그런데 Real이 코로나 이후로 문을 닫았다.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선 마트의 에코백은 아직 구매하고 싶은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으면 좋을 텐데, 생각할 때가 많았는데 오늘 들린 BUDNI 에코백이 그랬다.
평소에는 내 가방을 챙겨 다니니 관심 있게 들여다보지 않아 몰랐는데 아무 무늬가 없는 새하얀 에코백이었다. 가격은 0.75유로. 정신 사나운 디자인과 로고를 넣어놓고 1.5유로에 파는 다른 마트의 에코백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8월 18일 일요일
이제 몇 시간 후면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가야 한다. 이번 여행은 평소보다 좀 짧고 가족 행사가 많다. 가는 김에 일본도 가고 싶었지만, 코로나가 조금 걱정이 되어 일본 여행 계획은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뤘다.
보통 함부르크에서 한국으로 가는 저렴한 비행기표를 찾다 보면 아침 비행기인 경우가 많아서 늘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는 게 일이었는데 이번에는 아주 드물게 저녁 비행이다. 그래서 에세이도 여유롭게 마무리하고 갈 수 있게 되었다.
타지 생활을 하다가 한국으로 간다고 하면 물론 설레고 기대되는 일들이 많은데 -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거나, 맛있는 것을 먹거나 - 하지만 나는 좀 복잡한 마음일 때가 많다. 처음에는 먹고 싶은 곳, 가고 싶은 곳 리스트를 적어서 도장 깨기를 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반복되니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계획을 세워놓지 않으면 이도저도 아닌 시간을 보내고 올까 봐, 기왕 간 김에 먹었으면 좋았을 것들, 가보았으면 좋았을 것들을 놓치고 올까 봐 불안하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것들은 이미 일정상으로 놓쳤다. 일정을 짤 때 좋아하는 경기나, 좋아하는 콘서트를 아슬아슬한 일정으로 시도도 못해보게 되었다. 미리 조금만 생각했다면 다 갈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에 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냐며 나 자신만 탓해 본다.
“여행을 하는 것이나 병에 걸리는 일은
자기 자신을 반성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 다케우치 히토시
자극을 좋아하는 도파민형 인간이라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좋아하면서도 막상 그걸 손에 쥘 만큼 부지런하지는 못한 타입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래, 이렇게 또 나를 배워가는 거지.
처음엔 그저 엄마품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던, ‘귀국’에 가까웠던 한국행이 이제는 내게 여행이 되어버렸다. 이번 여행에서도 많이 성찰하고 많이 배우고 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