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에게 갈래

초겨울에 찾아간 오스트리아 호숫가 마을 '장크트 볼프강'

by 노이의 유럽일기
이 글은 2016년 11월 27일부터 2016년 12월 13일까지의 오스트리아, 독일 여행 후기 시리즈 입니다.



Dear Flyers,


혹시 겨울에 '따뜻한 나라가 아닌 나라'로의 여행을 생각한 적 있나요?

일단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말할게요. 특히나 저처럼 추위를 많이 타고, 손발이 차가운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저는 참 좋아해요. 그래서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초겨울에 오스트리아로 떠나는 일정을 망설임 없이 감행했는지도 몰라요. 떠나기 전의 저에게 날씨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물론 두꺼운 겨울 옷을 챙기고, 핫팩도 가득가득 챙겼고, 그래도 추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곳으로 가야만 했어요. 그렇게 가슴의 소리를 따라가는 것이 앞으로 제가 살아갈 지침이자 방법이기도 했거든요.


막상 가보니, 역시 녹록친 않았어요. 추위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조금만 돌아다녀도 쉽게 지치고 피로해졌죠. 특히나 저는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이동'이 있는 날 저녁은 아무것도 못하고 잠들기 일쑤였어요.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역시 봄 날씨, 여름 날씨 만큼은 아니었죠. 솔직히 아쉽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런 날씨라서 제가 가는 곳은 성수기에 비해서 사람들이 덜 붐볐고, 이 호텔에서만 해도 저 혼자 투숙하고 있어서 아주아주 조용해서 너무나 만족스러웠었죠. 차가운 바람도 들끓는 저의 상념들을 한 번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게 해주었고, 밖으로 나가기 귀찮은 날은 '날씨를 핑계로' 침대에서 뒹구는 일에 죄책감을 덜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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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이 바로 제가 할슈타트에 가기 전 임시로 두 밤을 묵었던 장크트 볼프강 끄트머리의 자그마한 숙소에요. 볼프강의 중심지에서 차로 7분 정도 걸리는 안쪽에 위치해 있어요. 그래서 숙박비가 저렴하지만, 교통이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죠. 제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혼자서 머무르기 딱 좋은 1인용 객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홀로 사색 여행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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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을 때의 모습이에요. 왼쪽은 욕실과 화장실, 오른쪽에 보이는 문은 옷장, 정면에는 보이는 것처럼 커다란 유리창과 발코니 너머로 호숫가가 내다보였습니다. 좀 좁긴 하지만 한창 복잡했던 머리속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어서 여행을 떠난 저에게 딱 맞는 방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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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들어서니 침대 옆에 1인용 책상이 가지런하게 놓여있습니다. 지금까지 저에게 호텔은 잠만 자는 곳이었다면, 이번 여행에서는 엽서를 쓰거나 수기 기록을 남길 일이 많았기 때문에 편안한 책상이 있는지 여부가 굉장히 중요했어요. 이 책상에서 플라이어스에 보내는 엽서들이 쓰여지기 시작했고,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쓰는 모닝 페이지, 잠들기 전 쓰는 하루의 기록들이 쓰여졌습니다. 참, 소박하면서도 집중이 잘 되는 책상이었어요.

찬 바람을 맞기 싫은데 바깥은 보고싶을 때에는 저 의자를 끌고 창가에 앉아 호수와 산과 나무와 오리를 지켜보았어요. 새벽, 해뜨기 전, 해뜬 후, 낮, 밤까지 하루에도 몇 번을 그렇게 유리창 앞을 오갔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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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바로 옆에는 혼자서만 잘 수 있는 싱글 사이즈의 침대가 가지런하게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나를 흐뜨려 달라는 듯 잘 정돈되어 있는 이불.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베개 2개. 아참, 지금도 저는 왜 침대에 1인당 베개가 2개가 있는지 알지 못해요. 높은 베개와 낮은 베개 중 골라쓰라는 의미인걸까요? 늘 그렇듯 저는 앞에 있는 베개를 끌어당겨 눕지만요.

여행을 다니면서 정말 1인용 침대와 사이즈의 객실을 잘 갖춘 곳은 처음 본 것 같아요. 마음에 쏙 들었지요.


그리고 벽에 걸려있는 저 그림. 무교이지만, 성모 마리아를 연상케 하는 그림이 이 방을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이불 밖은 위험한 이 험한 세상에 태어나서, 나에게도 저렇게 엄마 품에 안겨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잠든 나날들이 있었겠지. 강한 믿음과 굳건한 사랑이 느껴지는 그림이랄까요. 그림에 문외한인 저지만, 저 그림은 왠지 많은 생각이 들게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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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 조그마한 방을 다 둘러본 후 발코니로 나가면, 할슈타트와는 또 다른 느낌의 호숫가 풍경과 산, 하늘, 그리고 구름을 마주합니다. 호수에는 늘 오리가 몇 마리씩 노닐고 있고, 커다란 나무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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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경은 이 숙소의 장점을 보여주는 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볼프강 중심지에만 머물러서는 이런 현지인들이 사는 마을의 풍경을 볼 수는 없답니다. 안쪽으로 들어올 수록 건물이 부쩍 줄어들고, 인적이 드물어지고, 각도에 따라 조금씩 다른 풍경들이 펼쳐지는 정말 로컬스러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 자유 여행 중 놓칠 수 없는 묘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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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 오래 서 있기는 조금 벅찰 만큼 바람이 꽤나 차가웠지만, 다행스럽게도 구름은 걷히고 햇살이 호수위에 드리워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호숫가 위에는 늘 오리가 두 마리, 세 마리 정도 노닐고 있고, 이 추운 날씨에도 호수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녀석들이 저는 한 없이 부럽기만 했습니다. (어떤 고양이가 말했다지요, 불행하게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몸의 대부분이 털로 뒤덮여 있지 않아 우리들이 덮어주어야 한다고...) 털이 없어 슬픈 짐승은 오리님을 부러워하며 바라만 봅니다.



특히 이 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에서 추천하는 한 가지 가이드를 실천해보았었는데요.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직업'을 5가지 골라서 상상해보고, 그 날 하루를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 생각하고 살아보는 거였어요. 그 날 제가 적었던 직업은 이렇게 다섯 가지(+알파) 였어요.


1. 작가

2. 비행기 조종사

3. 야생동물 보호가

4. 외국어 선생님

5. 사진작가

(추가로 가수, 상담가, 사업가 까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고 싶은 것이 없다던 저에게 갑자기 무슨 이렇게 많은 꿈이 생긴 것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상상하는 것 뿐이니까 자유롭게 써내려갔죠. 그런 후 이 중에 무엇을 해볼까 곰곰히 생각을 해봤어요. 제가 무엇을 골랐을 것 같으세요?


정답은 '화가' 였어요. 정말 쌩뚱맞죠? ㅎㅎ 목록에는 없는 화가가 갑자기 뇌리에 떠오르면서 오늘은 그림을 그려보고 싶더군요. 참고로 저는 그림과는 전혀 무관한 인생을 살아온... 그림을 발로 그리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거야말로 지금이 아니면 못하겠더라구요. 이 순간, 이 장소에 이 풍경을 보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지만, 일행이 있었다면 과연 제가 풍경을 보고 가만히 앉아서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로 부끄러워서 못했을 것이고, 둘째도 부끄러워서 못했을 것이고, 셋째로는 뭐 시간 아깝다고 일단 밖을 돌아다니러 나갔겠죠. 호텔에 머무르지도 않았을 거구요.


여기서 혼자 다니는 여행의 장점을 하나 말씀드리자면, 주위를 의식할 일이 대폭 줄어들면서 굉장한 자유로움을 맛보게 되요. 그것도 주체적인 자유로움이죠. 해가 떴다고 해서 꼭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어디에 갈지 무엇을 먹을지 순수하게 나의 욕망대로 결정할 수 있고, 원할 땐 이렇게 방 안에 창문을 닫고 앉아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어요.



굉장한 자유로움을 맛보다



그래서 어찌어찌 제 그림이 완성(?)은 되었는데, 뭐 그냥 검은 볼펜 하나 달랑 들고 간 것이었고, 종이도 없어서 매일 매일 글을 쓰던 노트 한 페이지를 공간 삼아 그렸어요. 선도 제멋대로고, 구도도 엉망이지만, 정말 좀 특별한 기분을 경험한 것 같아서 여러분께도 공유해드리려고 해요. 아래 사진과 제가 보고 그린 풍경은 조금 달랐어요. (더 광각이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비전문가인 점 고려하셔서, 이렇게 그림을 발로 그리는 사람도 이런 걸 해보는구나, 나는 더 잘 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하시고, 다음 번 여행하실 때 꼭 그림 한 번 그려보시기를 바래요. 여행 드로잉을 알려주는 짤막한 수업들도 종종 눈에 보이던데, 전 그런 수업을 듣지는 않았고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그려본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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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샷, 인증샷, 단체샷을 담고 얼른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바쁜 우리의 여행 일정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사진과 또 다른 의미를 주는 것 같아요. 사진을 찍는 일도 매우 즐거웠지만, 그림을 그려보는 일은 뭐랄까, 글쓰기와 그 느낌이 비슷했어요. 한 글자, 두 글자가 모여서 글이 되는 것 처럼 한 획, 두 획이 모여서 그림이 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림을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다는 것도 느껴졌어요. 숲이 아닌 나무를 보고, 나무가 아닌 가지를 보고, 호수가 아닌 호수 물결까지 하나하나 바라보고 있었지요. 저는 이번 여행에서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린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요. 지금도 눈을 감고 떠올려보라고 하면 이 풍경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요. 한 획 한 획 꾹꾹 백지에 눌러담은 그림은 종이에만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제 마음에도 새겨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종이에 그리는 그림
마음에 그리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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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에베레스트를 오른 등산가에게 어떻게 산을 올랐냐고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길,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랐지요" 라고 대답했다고 해요.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랐지요



우리는 목적지에 '보다 빠르게' 도착하는 것에 환호고, 그 뒤를 따르려 하고, 박수를 보내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런 스토리가 우리의 마음을 울리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산을 단번에 오를 수 있는 마법을, 한 글자 두 글자 일일히 적지 않고 단숨에 한 페이지의 글을 쓰는 마법을, 눈 깜짝할 새에 멋진 그림을 완성 시키는 마법을 부릴 수가 없습니다.

한 걸음씩 오르고, 한 글자씩 써내려 가고, 한 획씩 채워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를 매일 살아내는 것 처럼요.


제가 저 볼펜을 쥐고 그림을 그렸을 때, 저에게는 지울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획 한 획을 그을 때 좀 더 진중해지고, 마음의 느낌, 손 끝의 감각을 따를 수 밖에 없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 하루도 그런 것 같아요. 이미 살아낸 하루를 지울 수가 없어요. 내가 내 인생이라는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인지 확신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려지고 있는 내 인생이라는 그림의 진행 과정은 내가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 나는 내 하루 하루를 마음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예쁜 그림은 아니더라도, 나다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요.


서울에 돌아가면 나는 아마도 이 느낌을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지하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뛰고, 빨리 돈이 많아져서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고, 빨리 글을 잘 써서 자신감을 가질 정도가 되면 좋겠다고 조바심을 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날의 아침을 기억하면서 나를 잠시 멈출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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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 후기는 '버킷리스트를 현실로 만드는 곳, 플라이어스'에서 진행하는 버킷리스트 달성 프로젝트의 하나로 여행 비용의 일부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지원금인 100만원을 넘어가는 여행 비용은 개인 비용으로 충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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