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2.
축하할 일이 있어 5성급 호텔의 뷔페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월요일인데도 테이블은 가득 찼다. 누군가는 촌스럽다고 할지 모르지만, 저녁 만찬을 위해 점심을 평소보다 조금 덜 먹고 간 나는 기어코 비어있는 위를 가득 채워 물 한 모금도 더 들어가지 않을 지경이 돼서야 수저를 놓았다. 불편한 포만감이 온몸을 사로잡았지만 동시에 할 일을 제대로 했을 때의 만족감에 뿌듯했다. 장장 세 시간의 식사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던 건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과 그것을 위한 몇 번의 수고로움, 그리고 일행과의 대화로 그 세 시간이 촘촘히 채워졌기 때문이었으리라. 주로 혼자서 10분 내외의 시간 동안 끼니를 때우는 형편인 평소의 식사에 비하면 특별한 한 끼였던 건 틀림없다.
살면서 뷔페를 이용할 일이 종종 있다. 이날처럼 특별히 찾아가는 경우보다는 결혼식이나 돌잔치 같은 경사에서 준비한 식사가 뷔페식인 경우가 많다. 나처럼 미식 취미가 없는 사람에게 뷔페는 꽤 괜찮은 식사인 게,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먹을 수 있고 음식 맛은 평준화되어 있어 어지간하면 다 맛있기 때문이다. 가끔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사람들이 자극적이라거나 맛대가리가 없다거나 먹을 게 하나도 없다고 불평하는 일이 있고, 때로는 ‘육회는 먹을만 하네’ ‘초밥은 괜찮네’ 하고 확고한 미식 취향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뷔페식은 꽤 환영받는 듯하다. 연회장에서 접시를 들고 줄을 선 사람들의 얼굴에는 (곧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우선은) 설렘이 드러나 보인다. 배가 고파서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다양한 음식을 맛볼 생각에 흥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막상 한 점씩 맛보고 나면 그저 그래서 결국 초밥으로 배를 채우게 될지언정 첫 접시를 채우는 손길은 기대에 차 있고, 그래서 신중하다. 뷔페마다 준비된 음식들이 거기서 거기라는 걸 알면서도 모든 음식을 한 번씩 일별해야만 찝찝함을 남기지 않고 식당을 나설 수 있다.
뷔페에 가면 인간이 어지간한 건 다 먹는 잡식성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산해진미에 더해 가공된 종류의 음식까지 더해져 우리는 참 골고루도 먹는다. 먹음직스럽게 요리된 음식들을 앞에 놓고 음식의 재료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는 좀처럼 생각하기 어렵다. 5성급 호텔 뷔페같이 음식값을 비싸게 치른 곳에서는 조금 더 신선하고 질 좋은 재료를 썼으리라 짐작하고 결혼식 뷔페는 그에 미치지 못하리라 짐작하는 정도다.
양갈비 스테이크와 대게 다리와 참치회와 양상추 샐러드를 함께 담은 접시를 앞에 두고 조금은 엄숙한 마음이 생겼다. 내가 이렇게까지 먹을 자격이 있는 걸까. 이렇게 거하게, 여기저기서 잡아 온 것들을 모조리 먹어도 되는 걸까. 평소에는 없어서 못 먹는 맛있는 요리들을 앞에 두고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새삼스러울 뿐 아니라 유치하다. 갑자기 공중으로 붕 떠서 미천한 현실 세계를 내려다보는 도덕가인 양 행세하려는 건 아니다. 사람마다 가진 자격이 다르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가끔 화가 날 때 한마디씩 하는 욕을 한꺼번에 모아서 듣는다고 상상해 보면 끔찍할 거다. 그런 것처럼 다양한 음식들이 한 접시에 담겨 있는 것을 보니 그런 생각이 스친 것이다.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아니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잡식성 동물이고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다양한 종류의 생물을 평생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요리해 먹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잘못된 건 없다. 그런데 퍼뜩 너무 많이 먹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혼자 연간 닭 8마리와 달걀 268개를 먹어 치우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게 왜 당연하지 않냐고 말한다면 딱히 반박할 말도 없다. 논쟁은 인류가 사라지거나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생명을 유지하게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생명을 먹어 없애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거다.
뷔페에 가면 개인적인 몇 가지 경험이 떠오른다. 대학생 시절에 짧은 단기 아르바이트로 뷔페에서 서빙을 한 적도 있고 출장 뷔페를 나간 적도 있다. 출장 뷔페 아르바이트는 단 하루뿐이었는데도 몸이 너무 힘들었던 기억은 강렬하게 남아있다. 어느 대학의 소강당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어 출장을 나갔던 것인데 내 몸만 한 들통을 계단으로 나르느라 애를 먹었다. 주관적 기억으로는 상하차 아르바이트에 견줄만한 고됨이었다.
어느 예식장 뷔페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한다고 해서 면접을 보러 간 일도 있다. 일요일이었는데 마침 결혼식이 끝나 하객들이 식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면접을 보러 왔다고 하자 누군가가 지배인을 불러주었다. 지배인은 밥은 먹었냐고 물었고 나와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지배인은 우선 밥을 먹으라고 자리에 앉혔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장에서 배가 터지게 뷔페를 먹었고 아르바이트는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지배인을, 혹은 나와 친구를, 아니면 세 사람 모두를 비난할는지도 모르겠다. 밥을 대접할 권한도 그 밥을 먹을 권리도 지배인과 우리에게는 없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그렇게 말할 자격은 주어져 있지 않을 거다. 그럼에도 그때 먹은 밥 한 끼가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면, 횡재했다고 생각했든 무자격취식의 옅은 죄책감을 느꼈든 나에게 특별한 한 끼였던 건 분명하다.
이리하여 나는 오랜만에 방문한 뷔페에서, 산과 들, 바다와 강에서 잡아 온 신선한 생물들, 알록달록 양념을 뒤집어 쓰고 우리를 맞이하는 수많은 요리들, 위(胃)에 들어갈 공간을 만들라고 유혹하는 달콤한 케이크와 싱싱한 과일들에 둘러싸여, 황홀하게 코를 찌르고 부드럽게 귀를 감싸고 혀뿌리에 침을 고이게 하는 감각의 미로에서 즐겁게 헤매기도 하다가, 친근한 사람과의 따뜻한 대화와 개인적인 추억 사이를 오가며 식사를 마쳤다. 식당을 나설 때는 뭔가 많은 것들이 잔뜩 휘저어져 섞여 버린 것 같은 몸과 마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엉뚱하게도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는 걸 알면서도 다양한 음식을 다양한 방법으로 만들어 먹듯이, 어떤 일이 지금과 같은 결과로 되었다고 해서 그 과정이나 그 안에 있었던 마음까지 묵살하는 것이 너무나 폭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결과적으로 너도 그렇게 됐잖아 라고 말해선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대충 사는 건 자유지만 대충 말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