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지 않아도 퇴근을 기다려

2021.05.22.

by 이이름


꽤 긴 기간 휴직을 한다는 소식을 조심스럽게 전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부러워했다. 휴직의 이유가 딱히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나는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도 아니고 몸이 아파서 요양하기 위해서도 아닌, 순전히 쉬고 싶다는 이유로 휴직을 하게 됐다. 완전히 그만둘 생각으로 이야기를 꺼냈는데, 충분히 쉬고 다시 돌아와도 된다는 제안은 너무 달콤했다. 나는 며칠 고민해 보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 제안을 받았을 때 이미 마음속으로는 결정을 내린 후였다. 나는 그냥 좀 쉬고 싶었던 거다. 입사 1년 후쯤부터 가슴에 품고 있다고 떠들어 대던 사표를 11년 만에 꺼냈고, 그 사표는 가슴 밖으로 나오자마자 다시 품으로 돌아갔다.


집에서 논 지 한 달 쯤 지나고 있다. 누군가 쉬어보니 어떠냐고 물으면 평생 놀아도 잘 놀 수 있겠다고 답한다. 정말 그렇다. 시간은 회사를 다닐 때 만큼이나 빠르게 흘러간다. 잠은 충분히 자야 하고, 밥은 꼬박꼬박 먹어야 하고, 밥을 먹고 나면 소화를 시켜야 해서 좀 쉬어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생명 유지 활동만으로도 하루의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남는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달리거나 책을 읽거나 공원을 잠깐 걷고 나면 금세 오후 여섯 시가 넘는다.


나는 오랫동안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삶을 반복해 왔다. 기다림은 몸에 뱄다. 여섯 시 경이 되면 몸이 말하기 시작한다. 어서 퇴근하라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다르지 않다. 여섯 시가 넘으면 이제 그만 쉬고 싶어진다. 하루 종일 쉬었는데도 말이다.


이게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아침에 늦잠도 자고 낮에 느긋하게 산책을 하면 밤에는 뭔가 다른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따 밤에 글을 써야지, 뭘 배울지 찾아봐야지, 책을 마저 읽어야지. 천만에.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잠들기 전까지 TV 앞에서 벗어날 수 없다.


TV에는 실시간 방송뿐 아니라 유튜브와 넷플릭스, 왓챠, 스포티비나우가 있다. 과거에 시간마다 채널을 돌리며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았듯, 정해진 패턴대로 OTT들을 넘나들다 보면 시간은 전자렌지에 돌린 치즈처럼 녹아내려 몸에 얹힌다. 어느새 창밖은 새까만 어둠에 점령당해 사위는 고요하다. 머리는 멍하고 몸은 끈적끈적 뭔가 개운치 않게 찌뿌둥하다. 자고 일어나서 켜야 마땅한 기지개를 잠들기 직전에 우악스럽게 한 번 켜고 침대로 들어간다. 죄책감은 방금 전 기지개와 함께 소파에 놔두고 새로운 결심만 침대로 가지고 간다. 내일은 사람답게….


패턴이다. 몸에 밴 습관이다. 돌아보니 퇴근 후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삼십대를 그렇게 흘려보냈다. 후회하는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그 시간에 뭐라도 꾸준히 했으면 지금 나는 뭐라도 할 줄 아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런데 잠깐. 그 시간에 뭐를 꾸준히 했으면 아무 생각 없이 누워서 TV 보는 휴식은 없었을 거라는 말인데.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뭔가를 꾸준히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퇴근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잠깐. 다 핑계고 변명이고 합리화다. 조세희는 엄청난 노동으로 하루를 마치고 밤늦게 퇴근해서도 꾸준히 글을 썼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그 생생하고 날 선 감각은 퇴근 후에도 쉬지 않았던 불굴의 정신의 발현이다. 조세희 뿐이겠나. 세상은 노동 이후의 시간에 인내와 고통 속에서 의미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왜 조금 더 인내하고 노력하지 않았나.


이런 식이다. 휴직 한 달, 지난 11년의 회사 생활보다 11년간 퇴근 후의 생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했다. 이미 지나버린 시간을 생각하는 건 사실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의 삶을 달라지게 하기 위한 되새김질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지나간 시간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한 달 사이에 몸은 달라지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되면 여전히 몸은 집으로 돌아가 소파에 누우려 한다. 오케이. 그러하다면야.


휴직과 함께 화이트보드를 사서 벽에 걸었다. 어떤 영감이든 계획이든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으면 써놓겠다는 심산이었다. 화이트보드는 깨끗하다. 깨끗한 보드에 새빨간 마커로 첫번째 계획을 적어 넣는다.


AM 09:00~PM 12:00 뭐라도 쓰기.


지금은 AM 11:30이다. 이제 점심을 먹고 산책을 나가자. 나가서 뭐라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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