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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Jul 05. 2018

민족의 지조와 기상이 담긴 사군자

영화 <사도>에서 영조가 공부를 게을리 하고 개 그림을 그리고 노는 사도세자를 보고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시대 왕이 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왠지 어색하다. 고고하게 사군자를 그리고 있는 게 자연스럽다. 만약 사도세자가 사군자를 그렸어도 영조가 화를 냈을까? 



개 그림은 사도세자가 직접 그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창덕궁 규장각 부속 서고에서 발견된 이 그림은 고궁회화 186번으로 ‘전(傳) 사도세자’ 라는 표제가 붙어 있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 달리 예술과 무예에 뛰어나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녔다. 


위의 글씨는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안부 서신이다. 글씨와 화병에 담긴 꽃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재능은 매화도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이어진다. 


사군자


조선시대 사대부가 즐겨 그린 사군자는 고고한 선비의 지조를 나타내는 조선시대 대표 문화였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추위를 무릅쓰고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은은한 향기로 주위를 맑게 하는 난초, 모진 서리를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국화, 푸름을 읽지 않는 대나무>로 시를 짓고, 글을 썼으며, 그림을 그렸다. 


사군자는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여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친 사대부 문화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부터 사군자를 그리기 시작했고, 조선시대 중기로 넘어가면서 대나무와 매화를 중심으로 조선의 고유색이 드러나는 독자적인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조 <매화도>


칼을 이긴 붓 삼청첩(三淸帖)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를 꼽으라면 이정, 유덕장, 신위를 꼽는다고 한다. 그 중 탄은 이정(李霆, 1554-1626)은 그 중에 손꼽는 화가다. 세종대왕의 후손인 이정은 30대부터 묵죽화의 대가로 불리며 글과 그림에 전념했다. 


왕손인 이정은 39살에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오른팔에 큰 부상을 입는다. 화가로서 생명인 오른 손을 상한 그는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 국난에 힘겨워 하던 이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삼청첩이라는 화첩을 제했다. 상처를 딛고 일어선 그는 더 큰 대가로 발전했고, 삼청첩(三淸帖)은 칼을 이겨낸 붓이라는 칭호로 당대 ‘일세지보’로 불렸던 조선 중기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다. 


이정 <묵죽>

  

이정 <순죽>


먹물을 들인 검은 비단 바탕위에 금가루로 그린 20폭의 매화, 난, 대나무는 우국충절의 마음이 잘 서려있다. 이 삼청첩은 임오군란 당시 일본으로 넘어갔지만 간송 전형필이 거금을 주고 다시 구매하여 현재 간송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상청첩의 흑견금리(Black silk Gold dust) 중 대표작인 <순죽(筍竹)>은 대나무가 성숙해가는 과정을 그린 그림이다. 죽순을 시기별로 금가루로 농담을 조절하며 섬세하게 표현해놓았다. 삼청첩에는 묵죽의 대가답게 다양한 대나무 그림이 있다. 


이정 <풍죽>


이정의 작품 중 유명한 작품은 <풍죽>이다. 이정의 말년에 그린 그림으로 바람 부는 날 휘날리는 대나무를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1그루는 진한 묵으로 그리고 뒤에 3그루는 농묵으로 흐릿하게 그려 깊이를 부여하고 잔영의 울림을 표현했다. 대나무 잎은 바람 부는 방향으로 줄기는 바람과 반대 방향으로 그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의지와 정신력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5만원권 지폐 뒤의 배경그림이기도 하다. 5만원권 뒷면에 어몽룡의 <월매도> 아래 실루엣처럼 보이는 그림이 바로 이정의 풍죽이다.

 


감정 풍만한 김홍도의 백매 


백매(白梅) 김홍도(金弘道, 1745-1806), 80.2 × 51.3cm, 지본담채


정조가 가장 총애했던 화가 김홍도가 그린 사군자의 걸작 ‘백매’다. 김홍도는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 만의 감정 선이 살아있는 사군자를 그렸다. 그는 지조와 절개보다는 감정이 풍만한 낭만과 서정적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연한 먹으로 출렁거리는 선을 표현하고, 감정과잉이 자못 느껴지는 굵은 선으로 매화의 뒤틀림을 나타냈다. 아련하고 소박한 하얀 매화 꽃 봉오리는 호분이라는 조개껍질로 표현하여 매혹적인 진주 빛을 발한다. 


김홍도는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정조 승하 후 벼슬에서 내려오고 가난한 삶을 살았다. 아들에게 학비도 못 보낼 정도로 가난 했던 그는, 그래도 인간의 감정에 충실했다. 어려운 형편에 그림을 3000전에 팔아, 2000전 짜리 매화분재를 사고, 800전으로 술을 사 퍼지게 나누어 먹고, 200전으로 땔감을 살 정도로 말이다. 거문고와 피리를 좋아하며, 꽃 피면 웃고 슬프면 노래 부르는 풍부한 감성과 외로운 기운이 가득한 김홍도의 삶이 진하게 배여 있는 그림이다. 


일제에 저항한 김진우의 묵죽



일제 강점기 묵죽은 항일의지로 나타내기도 했다. 항일애국지사 김진우는 1944년(51세)에 묵죽으로 항일의 의지를 표현했다. 글과 그림에 능했던 김진우는 12살에 의병에 참여해 옥안에서 가마니를 뜯어 붓을 만들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묵죽을 보면 차디찬 가을에 쌍죽의 대가 막힘없이 곧게 솟아 있다. 창 같은 줄기와 칼날 같은 댓님은 차디찬 냉기와 삼엄함을 표현하고 있다. 일본의 억압에 대하 저항의지를 표출하고자 하는 정신이 묵죽 그림에 그대로 담겨있다. 


이러한 사군자 그림의 가장 큰 한계는 구체적인 인간과 현실을 그리기보다는 자연에 현학적인 개념을 부여하여 그렸다는 점이다. 검은 수묵에 갇힌 성리학 즉 군자의 이상주의적 세계관의 한계였다. 이는 채색을 소외시키고 표현에서 구체성과 사실성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대상을 개념으로만 표현하던 기존의 틀은 깨지기 시작한다. 사군자 안에서도 예리한 관찰과 진지한 탐구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채색이 더 해지며 근대 회화의 초기 모습을 띄기도 한. 이런 틀은 김홍도와 신윤복 등의 사실주의적 창작태도로 꽃 피어나며 우리 전통화로 완성된다. 


이렇듯 매난국죽, 사군자에는 고고한 우리 민족의 지조와 기상이 담겨있다. 한편으로는 그 곧음이 그리워지는 요즘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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