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김애란 <바깥은 여름>을 읽고
트럭을 모는 아빠가 싫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읍내 애들은 그런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 것 같았다. 아파트에 살고 세단을 모는,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는 아빠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 작고 작은 도시에서, 이젠 정말로 언젠간 사라질지도 모를 만큼 더욱 작아진 그 도시에서조차 그 어린 나는 그랬다. 어디서 그런 부끄러움을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하기엔, 그런 감각은 그냥 날 때부터 접촉한 모든 곳에 잠복해있다가 때가 되면 내것이 되는 것 같다.
원래부터 싫어했던 건 전혀 아니다. 밭에서 금방 뽑은 무를 아빠 트럭에 가득 싣고 당시 거래 중이던 근처 대형 마트에 따라가는 게 참 재밌었다. 차 안에선 뒷쪽 도로가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트럭 가득 높이 쌓인 무를 보면 아빠가 뭔가 굉장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가 어딜 갈 때마다 동네 꼬맹이들과 트럭 짐 칸에 타고 쫓아가는 것도 중요한 놀이 중 하나였다. 친구들이 놀러오면 꼭 거길 태워주고 싶었다. 다른 데서는 겪지 못하는 멋진 경험을 나는 매일 하고 있는 것인 양 자부심도 들었다.
면에 있는 학교를 떠나 읍내를 다니게 되고, 못난이 십 대 시절이 오면서부터였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불길한 여드름처럼 말도 안 되는 수치심이 불쑥 생겨났다. 그때부터 아빠는 내 인생에서 점점 더 작아졌다. 한 때 유행하던 두뇌 지도를 그리자면 점 하나 정도는 되었으려나. 겨울이면 비료포대로 썰매를 만들어 끌어주고, 난생 처음 시냇물에서 고기를 모는 재미를 알려준 자상한 아빠, 내 동생과 나를 동시에 팔뚝으로 들어올리던 멋진 아빠는 점점 내 머리속에서 지워졌다. 시골에 가면 소랑 말이랑 동물들이랑 놀 수 있다는 아빠의 말에 반짝였던 내 눈은 시골 생활에 대한 답답함, 별거 없는 인생에 대한 실망감 속으로 흐리멍텅하게 숨었다. 나와 내 겉모습과 내 사회생활에 관심을 빼앗기면서 나는 점점 사회화란 이름 속에 늙어갔다.
이제 나는 아빠가 떠났던 도시에 둥지를 틀었고, 내 몸 뉘일 자리를 유지하느라 내 젊음을 갉아먹고 있으며,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중교통을 다리처럼 사용한다. 아빠를 지치게 했던 빠르고 삭막한 기운 속에서 나는 이곳이 내가 생존해나가야 할 곳이 맞는지 의심하지도 못한 채 도시전설처럼 살아내고 있다. 시골 길을 시원하게 내달리던 아빠 트럭의 경쾌한 진동은 물론 그 진동조차 마치 내 인생의 불행한 대사건인 양 싫어했던 시절의 감성도 까맣게 잊었다. 이젠 가끔씩 아빠의 집을 방문하는 건 내 인생에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이벤트 같은 외박처럼 느껴진다. 그냥 난 여기, 아빤 거기, 우리 인생은 그냥 이렇게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고, 다른 채 늙어간다고, 그렇게 나는 그냥 이 도시 안에서 내가 꾸려온 거칠지만 안정감 있는 삶 속에 푹 빠져있었다.
그런데 오늘 읽은 김애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은 갑자기 어떤 기억을 내 삶에서 툭 건져올렸다. 매일 조금씩 수치심을 체화해가던 십 대의 어느 날 나는 돗자리를 깔고 트럭의 짐칸에 누워있었다. 시원한 것보단 약간은 차가운 바람이 간헐적으로 불었던 것 같다. 도시에선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여전히 고향 집의 밤은 일부러 까맣게 염색한 까만 머리카락보다 더 까맣다. 그 검정 속에 우리 집 창에서 새어나오는 불빛과 있으나 마나 한 위태로운 가로등 하나, 가끔씩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의 차를 제외하면, 보이는 건 별과 달뿐이다. 게다가 아빠 트럭에 누워 하늘을 보면 하늘하고 나밖에 없는 것처럼 밤이 나의 사방을 뒤덮었고, 나는 그 까만 고요함에 파묻혔다.
나는 그 날 별을 보고 있었다. 별똥별을 보고 있었고, 별 너머로 나의 먼 미래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 별한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왜 그러고 있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까만 밤 가운데 그냥 그 장면이 식탁보 위 국물 자국처럼 남았다. 코끝이 시린 밤이었고, 나는 무척 젊었다. 별이 예뻤고 나는 지금처럼 묵직한 복잡성 없이, 아니 내가 만들어낸 가짜 같은 바쁨과 허덕임 없이 그 밤을 온전히 느꼈다. 이 기억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강하게 묶여 있는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세세한 기억이 불쑥 책을 다 읽은 일요일 저녁 시간을 잡아먹었다. 꺼내어 놓고 보니, 잊었을 뿐 아니라 나는 잃고 있었다. 내 인생의 어떤 일부분을.
내 정강이 길이 만큼 자란 동생의 아들이 이제 아빠의 팔뚝에서 새로운 세상을 본다. 저 아이는 모든 것이 새로울 테고, 모든 것이 커보이겠지, 세상은 보잘 것 없는 존재인 것처럼 감춰버린 아빠의 모든 것이 저 아이에겐 어린 시절 나처럼 재미이자 멋진, 자상한 할아버지의 포근함으로 다가오겠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모든 게 처음 만나는 세상일 때가 있었는데. 수치스럽지 않고 아무렇지 않고 온전히 처음이라서, 그냥 시원해서, 그냥 재밌어서 좋았던 것들만 가득한 때가 있었는데. 어쩌면 나이를 먹어가면서 또 세상에 부딪치면서 뭔가를 배워가고 얻어간다는 건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냥 매 순간이 상실의 순간일 뿐인데 상실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지내는 게 아닌가. 예뻤던 그 어느 밤이 이젠 서글퍼진 것만큼이나 그간 나는 많은 걸 잃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너무 커버렸고 늙고 있음을 더욱 짙게 느껴갈 일만 남았다. 이젠 아빠를 이해하려 애쓰던 시간조차 까맣게 지나, 이해할 필요 없이 그냥 같이 존재하는 때가 되었다. 그리고 아빠와 나는 같이 인생을 상실해가고 있다. 때로는 서로 부딪히면서 그냥 이유 없이 벌어진 사건처럼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이 자연스럽고 서글픈 상실감. 뭔가 큰 걸 잃고 있지만 한편으론 잘 버티고 있다는 마음. 이 모든 것을 어찌할 줄 모른 채 살아내는 사람들. 상실의 얼굴을 초점 없이 멍하게 마주하고 있는 평범한 우리들. <바깥은 여름>이 여러 챕터를 통해 내게 보여준 삶의 그림자가 아니었나 한다.
내가 살아내고 상실해갈 이 여름 밤의 바깥은 도시 같은 내 마음처럼 너무 밝고 시끄럽다. 아빠는 내가 잃은 시공간에서 까만 여름 밤을 줄어드는 머리카락처럼 자꾸만 자연스럽게 잃고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같이 잃어가고 같이 더워한다는 생각에 약간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