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황정은 <아무도 아닌>을 읽고 이연주 연출 <아무도 아닌>을 보고
가장 나쁜 것을 상상해도 그것보다 더 나쁘고 가장 좋은 것을 상상해도 그것보다 더 좋다. 삶은 대체로 그랬다. 생각과 실제가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스스로 진짜일 수 있고 진짜로 완전무결하게 무죄일 수 있으며 솔직함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고 가장 확실해질 수 있는 순간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무언가가 내 몸과 마음에 당도한 바로그 순간뿐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 지나면 내가 책임질 수 없고 짊어질 수 없는 수많은 선택지들과 경우의 수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평가란 것이 개입되고, 평가가 개입되면, 생각보다 나쁘고 생각보다 좋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보통 때는 생각하지 않고, 외면하거나 모른 척하는 사건과 감정들을 너무나 정확한 문장으로 끄집어 낸 소설들을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담담한 듯한 한국 소설이 때로는 내 건강에 나쁘고 아픈 이유다. 소설가는 무슨 마음으로 무엇을 남기기 위해 그런 시간들을 너무 잘 만져진 문장으로 적어내려가는 것일까?
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모든 걸 알 수도 없다. 그렇기에 다른 것에서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실수를 저지른다.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항상 누군가에겐 피해를 끼친다. 나는 아이를 잃은 뒤 서로 말할 수 없는 첨예한 감정의 섬을 쌓는 부부의 마음을 모른다(누구도 가본 적 없는). 나는 애매모호했던 상황을 신고하지 못해 최후의 목격자가 되어버렸던, 스스로아무도 아님에도 아무도 아닌 타인에게 고통받아야 하는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양의 미래). 하지만 이 사건과 감정은 실제로 존재한다. 사람들의,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뻔하고 평범한 수근거림의 일부로 항상 존재한다. 언젠가 나는 그 무심함의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폭력에 가담했을 것이고 방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폭력에 가담하거나 방관하는 순간, 혹은 다른 어떤 순간에도, 내가 당도해있던 바로 그 어떤 순간에 나는 과연 스스로 진짜가 아니라거나 확실하지 않다거나 죄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다. 나는 그냥 내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고 짊어질 수 있을 만큼의 즐겁거나 멍청한 짓을 하면서, 잘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 삶이 지금 내 생의 메인 테마를 구성했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도 나는 모든 순간에는 나름대로 진심이고 진짜였고 진지했다. 그게 즐겁고 멍청한 순간이었든 심각하고 중요한 순간이었든. 하지만 다각도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의 성질은 달라지고 만다. 그걸 깨달았을 때, 내가 몰라온 혹은 모른척해온 세상의 사사롭지만 중요한 일들 때문에 마음이 아파진다. 보통 세상에 회의감을 갖고 있는 나지만 생각보다 세상이 더 나빠보인다.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만큼은 아무도 아닌 내가 아무도 아닌 타인에게 아무도, 나조차도 모르게 저질렀을 최악의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 이 지구에 살아가는 수많은 구성원들의존재에 대해 비관하게 된다. 우리 존재는 이렇게나 최악인데 무엇 때문에 매일 손톱만한 일들로 짜증내고 고민하고 아등바등 아득바득거리는 걸까? 그런데 그게 또 인생이다. 우린 모든 걸 책임질 수도 책임질 필요도, 짊어질 수도 짊어질 필요도 없다. 그렇게 된다면 제대로 된 인생을 살지도 못할 것이다. 살아있는 한 무해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꽤 슬프고 아픈 일이다. 너무 태고적부터, 존재가 시작된 순간부터 무수한 아무도 아닌 존재들이 아무도 아닌 존재들에 의해 상처받고 고통받고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고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세상이 지속되고 내가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다. 그래서 대체로 세상은 생각보다 나쁘다.
상당히 어두운 이야기 같지만, 사실 정말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은 오히려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나의 괴로움은 이미 누군가 겪어봤고 겪고 있다. 나의 기쁨도 슬픔도, 한발 떨어져 생각하면 그저 그렇고 뻔한 이야기속의 하나다. 나는 우리 엄마 아빠의 특별한 존재로 살아가지만 세상에게 나의 존재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렇게 세상은 대체로 누구에게나 생각보다 나쁘기 때문에 좋을 수 있다. 무엇보다 나는 너무 많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순간 순간 내가 진짜라고 느끼는 것들을 성실하게 해나가면 된다. 아프더라도 배워나가면 된다. 그런 데서 생각보다 더 좋은 것들이 만들어진다. 그게 내가 삶을 대하는, 대하고 싶은 태도다. 결국은 내가 가장 진실할 수있는 그 ‘순간’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괜찮게 만들기 위해 이런 소설이 불러오는 파동을 통해 세상과 스스로를 뜯어보고 평가하는 시간이 평소에 필요하다.
신촌극장에서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 중 ‘양의 미래’와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을 각색한 연극을 봤다. 소설을 다시금, 다른 매체를 통해 감각적으로 읽었다. 문장을 구성한 많은 심상을 잘 살려내 전달해준 배우들의 목소리와 다른 여러가지 연출적인 요소들이 소설을 마음속에 내리꽂았다. 소설을 주사로 맞은 기분이랄까. 그래서소설을 읽었을 때만큼 참 힘이 들었다. 어떤 순간은 소설보다 더 힘들었다. 어떤 문장은 연극 때문에 더 큰 빛을 봤다고 생각했다. 좋은 경험이었다. 연출가가 <전화벨이 울린다>의 연출가라고 해서 보러갔는데, 다음에도 이 분의 연극을 더 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많은 사건과 감정을 외면한 평범한 하루를 견뎠다. 하지만 좋은 책과 연극을 봤고 혹독한 평가의 시간을 거쳤으니 다음 순간엔 오늘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다. 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