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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 Apr 12. 2020

나는 나를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2020년 다짐

2019년 연말에 써놓고 이제야 발행한다.

그 사이 나는 더 나아졌을까.

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해 발견해가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건 꿈이나 희망보다는 스스로 세운 장벽이다. 난 이래서 안 돼,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해도 될까?


나는 “너는 이상해” “왜 너만 다르냐. 남들은 그냥 하는데” “혼자만 잘난 애”라는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가족들에게서 들으며 자랐다. 가족들은 내 특성을 이해하거나 내 생각을 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다, 내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꾸짖었다. 난 단지 왜 할머니 말처럼 여자는 잘라놓은 키위의 제일 큰 중간 부분부터 집어먹으면 안 되는지, 왜 엄마가 고생하는 명절을 굳이 치러야 하는지 궁금했을 뿐인데. 난 단지 가족들이 원하는 공무원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난 단지 불편하고 재미없는 옷을 입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어릴 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서른이 넘어서도 가족들은 나를 고립시켰다. 결혼 전 내가 결혼에 대한 어른들의 집착을 비웃자, 우리 고모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이상해졌다”고 했다. 결혼 후 큰 아빠는 내게 굳이 친히 전화를 걸어 “남편을 하늘 같이 모시라”고 했다. 엄마 아빠는 시부모 앞에서 죄인처럼 굴고, 맨날 나더러 잘 모시라고 한다. 뭐 그런 집안에서 자랐다.


그러면서도 나는 가족을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했다. 그들이 나에게 상처를 주려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란 걸 머리로 알았기 때문이다. 배움이 부족했고, 그 시절엔 다 그랬고, 허나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을 나는 아주 일찍부터 알았기 때문이다. 이건 그 사람들 개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한테 이 상처는 아주 깊다는 걸, 서른 넘어 들춰본 내 마음이 까맣게 외치고 있더라. 영문을 모르는 가족들은 나의 독한 말에 한층 더 억울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란 나는, 나를 항상 의심한다. “내가 좀 예민한 거 아닐까. 내가 좀 이상한 거 아닐까.” 난 가족들에게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면서도 내가 이상한 사람은 아닐까 의심했다. 우울한 날이면, 나를 책망한다. “왜 나는 남들처럼 모든 일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할까. 내가 정말 이상한 사람인 걸까.” 그리고 우왕좌왕한다. “좀 싫기는 한데, 또 안 할 수는 없어. 마음은 안 그렇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가니 싫어할 수 없어.” 감정을 무시하고 머리부터 굴린다. “싫고 좋은 마음을 잊고,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들 먼저 챙기자”


이 의심은 내 인생에서 즐거움까지 빼앗아갔다. 나는 뭐 하나를 깊게 들여다보지 못한다. 관심사는 굉장히 넓고 호기심은 많은데, 끈질기게 오래 밀고 나가는 힘이 부족하다. 그 이유는 “이걸 해서 뭐 해”라는 마음 때문이다. 과정의 즐거움 자체를 즐기기 보다, 가시적 성과를 빠르게 잡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즐길 줄을 모르는 것이다. 대신 해야 하는 일, 실패가 적을 것 같은 일, 전망 좋아보이는 일에 집중하고 100m 달리기를 해서 결과를 낸다. 이 사이클이 오래되다 보니, 나 심지어, 언제 내가 즐겁고 행복한지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자산 관련 유튜브 방송에서 누군가 단기 주식 투자를 하고 조바심을 내는 사람들을 빗대어 ‘나무를 심고 나무가 자라기를 기다리기 보다 몇 센티미터 자랐나 맨날 들여다보고, 심지어는 빨리 안 자란다고 뽑아버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내 삶에서 말이다.


내가 올해 발견하고, 벗어던지기 위해 발버둥친 건 이 마음들이다. 나는 나를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또 내 마음을 존중하기로 했다.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다. 머리로 이해가 되는 것과 싫은 마음은 아주 별개의 것이다. 이해가 되더라도 싫어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했다고 누군가 나를 질책한다면, 그 질책의 마음은 내 몫이 아니다.


내 몫은, 내가 원하는 걸 인정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이다. 만약 자신의 기대와 다른 선택을 하는 내가 못미더운 사람이 있다면, 그 못미더운 마음을 둘러싼 여러 가지 마음은, 내 몫이 아닌 그 기대를 가진 사람의 몫이다. 상처를 받든 미워하든, 그의 몫이다. 내가 원하고 사랑하는 일들을 선택했을 때의 내 마음은 타인의 기대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이 마음을 가지려면, 내가 나를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나를 믿고, 사랑하고, 기다려줘야 한다.


올해 나에 대한 탐색에 영감을 준 사람들과 콘텐츠가 참 많다.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한 해가 되어서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많은 분들이 있었지만, 딱 세 사람이 정말 기억에 크게 남는다. 한 사람은 <세상 물정의 물리학>을 쓰신 김범준 교수님.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짧게 이야기 나누는 순간에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순수한 즐거움을 누린다는 게 무엇인지를.


나는 뭔가가 정말 즐거웠던 순간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몇 가지 없다. 다섯 손가락이면 충분히 셀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야 조금씩 그런 순간들을 쌓아가고 있고,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교수님은 하시는 일 자체를 너무 즐거워하시는 게 느껴졌다. 인터뷰에서 사실 나는 과학에 관심 없는 일반인에게도 과학의 매력을 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까 싶어 '왜 과학을 하는지' 여쭤봤는데, 내가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았다. 과학의 실용성, 대중에 대한 함의, 물론 있지만, 그 이전에 이 분은 그냥 이 일을 너무 좋아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가 너무 재밌어서 하시는 거였다. 그냥 그 순수한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하고 계셨다.


또 한 사람은 수향의 김수향 대표. 그는 빛나는 사람이다. 그를 만나고 와서는 남편에게 한 시간 넘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도 사업을 하면서 힘든 일들이 있겠지만,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기 보다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는 그가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다. 실패할까 두렵지 않냐는 물음에 “잘 될거예요. 나니까”라는 대답을 하는 그녀를 보면서, 아 나도 예전엔 저런 깡다구가 있었는데 다 어디로 사라졌지, 하는 깊은 회한도 들었다. 동시에 나를 좀 더 믿고,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고, 용기를 얻었다.


마지막 한 명은 내 남편. 그에게는 내가 갖지 못한 게 있다. 덕력. 한번 빠져든 건 끝까지 깨부수고 더 이상 할 게 없을 때서야 빠져나오는 힘. 그리고 빠져든 건 그 자체로 즐기는 힘. 그리고 더 좋은 것은, 세상 누구보다 나를 이해하고 믿는 힘. 내가 주저하고 힘들어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순간마다 그는 나를 힘껏 도왔다. 스스로도 내가 나를 의심하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때, 그는 내 의심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해줬다. 내가 충분히 즐거울 수 있도록 시간과 자원 면에서 충분한 지지를 보일 것임을 항상 어필했다. 큰 힘이 됐다.


나는 최근에 우리 가족을 용서했다. 그들은 용서받은지조차 모르겠지만 나는 용서했다. 그 이유는 내가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로 가족들한테 화가 아주 많이 났고, 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그들을 싫어했으며, 오랜 시간동안 상처받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족과 이전보다 더 편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게 됐다. 어떤 개소리가 와도, 한층 더 아름다운 말로 화답하며 넘겨버릴 수 있게 됐다. 상처받지 않는다. 큰 발전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내 삶은 이제부터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이제 즐거움을 안다. 내가 나를 의심할 때의 느낌을 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앎은 없다. 나는 더 좋아질 것이다. 세상과도 더 좋은 관계를 맺을 것이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부족함에 머물러 있기보다 뭐라도 하고자 하므로, 더욱 나아질 것이다.


새해에는 더욱 간절히 바란다. 내 가능성, 나의 욕망, 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기를. 나는 그냥 나이고, 내가 원하는 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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