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할 집 5평에 8명씩 거주하는 사람들
결혼할 때 얼핏 이야기만 들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살았던 집이 있는데 20년째 철거하길 기다린다고 말이다. 그리고는 잊었다.
그리고 결혼한지 다시 15년이 지났으니 현재 기준으로 35년이나 철거하길 기다리는 중인 것이다.
결혼후 2년후 딸아이가 생겼고, 딸아이의 호구(?)를 그 집에 넣는다고 한다. 왜 넣느냐고 물으니 상하이에서는 집이 철거가 될때 두가지 기준으로 보상을 해준다고 한다. 첫째는 집의 면적 두번째는 집에 거주하는 인원수. 첫번째 보다는 두번째가 중요했다고 한다. 얼마나 보상을 받느냐고 물으니 과거에는 인당 기준으로 면적을 상정하고 그 상정된 면적만큼 집으로 나누어 준다고 한다. 인당 40 평방미터 기준이라면, 8명이 거주하고 있다면 320평방미터의 집을 받는다는 것이다. 상하이 사람들이 집이 2~3채인 이유중 하나가 그 이유라고 한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냐고 물으니 금전적인 보상과 집의 보상이 동시에 이루어 진다고 한다. 그만큼 집으로 보상하기 힘드니 일부는 금전적 보상이란다. 결국 딸아이를 그 집에 거주하는 것으로 하면 30만위안(약 6천만원)의 추가 보상이 생긴단다. 그래? 그럼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장모님은 3남매인데 그럼 3남매 모두와 자녀 그리고 손주, 손녀들 하면 총 11명인데 왜 3명이 빠졌냐고 물으니 그중 3명은 각각 다른 곳에도 보상을 받을 곳이 있어 거기에 등록을 해놓아 여기에는 거주하는 것으로 할 수 없다고 한다. 결국 모든 사람은 적어도 한곳에는 보상받을 곳에 거주하는 것으로 등록이 되어있단 뜻이다.
장모님의 오빠는 당연히 손해볼것 없으니 OK 했으나 언니는 여동생과 경쟁관계인듯 했다. 언니 즉 이모님이 반대를 한다. 전체 배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추가되면 총액도 추가되는데 말이다. 한마디로 동생이 돈을 더 벌면 배가 아프다는 소리다. 결국 장모님이 양보를 해서 딸아이 추가해서 돈을 더 받으면 그건 각 33.3% 씩 나누어 주기로 했단다. 그리곤 한마디 하고 그걸로 끝이다. 더이상 투덜되지 않는다. 이걸 보면 장모님, 장인어른은 내가 보아온 사람들보다는 꽤 괜찮다. 내가 장모님, 장인어른을 좋아하는 이유중 하나다.
다시 13년이 지나 2022년, 이 지역은 과거 농촌 스타일의 집들로 지금처럼 독립적인 곳들이 아니라 2020년에 발생한 코로나로 방역관리가 되지도 않고 상하이시 정부에서도 더이상 미룰 수 없다고 느꼈는지 35년만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철거할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35년간 7명이 거주하다가 딸아이 1명 추가 현재 8명. 35년간 5평짜리 집에 등록이 되었건만 또 규정이 바뀌었다. 이제는 인당기준이 아니라 면적 기준으로 바뀐었다고 한다. 결국 헛수고(?)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이해가 되었다.
어떻게 면적 기준이 아니고 인당 기준이었을까?
자본주의에서 살고 살던 땅값 기준으로 보상을 받던 한국에서의 경험이 그것을 나도 모르게 기준으로 삼은 것이었다. 중국 공산주의(?)에서는 결혼을 하면 집을 주던 기준대로 하면 인당 일정 토지, 집을 나누어 주는것 또한 당연한 기준이었던 것이다. 사유재산이 점차 인정이 되고 상하이가 발전이 되고, 집값이 급등을 하던 와중에 그 과도기로 철거 등이 되면서 이런 식으로 돈을 버는 구조가 생겼던 것이지 싶다.
자본주의화 된 현재에는 다시 우리나라 기준인 땅값기준으로 보상체계가 변경이 되었고 말이다.
하여간 그 과도기에 집이 철거가 되면 면적기준이 아니라 인당 기준이니 거주 등록을 마구 해놓고 인당 일정 면적을 배당 받았던 시기를 겪었으니 기본이 두채, 그리고 추가로 그런 집들을 추가 구입을 하다보니 3~4채까지 되지 않았나 싶다. 과거 무상으로 받았던 집들이 1가구 1자녀 정책이 되면서 조부모, 양가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까지 하니 상하이 친구들은 급여받은 것으로 용돈을 하고 미래를 위한 저축은 하지 않는 친구들도 적지 않았던듯 싶다.
이정도 썼으면 오해하실 수도 있는데 울 아내는 그렇진 않다. 일단 부모형제들이 각각 3남매들이시고, 정책에 따라 가족중 한명은 농촌으로 내려가야했고, 3남매중 장인어른, 3남매중 장모님 그렇게 시골로 내려가 살다 상해에 오셔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집을 배당받지 못했다고 한다. 덕분에 아내는 또래 친구들과 달리 알뜰한 편에 속한다. 최근 경기가 않좋다고 우리집도 다시 긴축재정을 한다고 선포를 하기도 했다.
나는 운이 좋다. 집이 여러채가 아니라 마인드가 건강한 상하이 친구와 결혼을 했으니 말이다.
참 나는 그런 생각을 왜 못했을까? 15년간 철거할 예정인 그 집을 볼생각을 하지 못했다. 장인어른, 장모님도 굳이 그 깔끔하지 않은 집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 싶다. 딸아이가 철거할꺼라는 이야기와 자기 엄마가 그곳에서 유치원까지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집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고 나니 나도 보고 싶더라... 8명이 거주 등록되었다는 그 5평짜리 집 말이다.
먼저 쇼핑몰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그 집으로 갔다.
참고로 위의 사진과 아래 사진은 180도 방면에서 찍은 사진이다.
신천지라는 또 다른 이름의 쇼핑몰 바로 건너편이다.
위 사진과 아래 사진은 바로 길건너에 있다. 어떻게 이런 극과 극의 장면이 있을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여기는 거주하고 있는 분과 거주하지 않고 소유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장모님은 거주하면 나갈때 분쟁의 소지가 있다며 임대를 놓지 않고 35년이나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골목에 다시 골목으로 들어간다.
옆집 사는 분이 마침 나와서 음식을 하시던데 아시는 분인듯 했다.
서로 인사를 하고 소개시켜 준다. 35년째 여기 거주중이신 분이다.
2층이라고 한다.
2층에 또다른 방이 있다. 2층 전체가 아니라 2층중 그중 하나다.
여기는 실거주하는 곳이다.
바로 요기가 8명이 거주한다고 등록된 곳이다.
원래 거미줄쳐져있고, 꽤 지저분했는데 손녀딸이 보고싶다고 하니 장인어른이 주말에 와서 열시간을 청소하셨다고 한다.
요 아래 침대에서 아내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유치원다닐때의 아내가 함께 잤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초등학생이던 4촌오빠는 간이 침대를 놓고 그렇게 실제 4명이 살았다.
아래는 다락방.
창문이 열리기도 한다.
다 구경하고 다시 돌아가는 길, 바로 길건너가 그 쇼핑몰이다.
길건너가서 다시 사진을 찍어본다.
지금으로부터 40년전 한국에서 철거할 집에 세들어 살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중국에서는 아내가 철거할 집에 살았다니 6년 나이차이가 나니 마침 비슷한 시기에 각 철거할 집에 살았던 인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