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는 왜! 텔레마케터 요정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지난 대선 기간, 둘째는 투표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대선 후보의 전화를 받고 당황스럽게 얘기했다. 둘째는 이제 초등학교 6학년, 작년부터 핸드폰을 쓰고 있지만 주소록에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고모, 이모... 가 다였는데, 주소록에 없는 전화가 오는 건 아이에게 신기면서도 불안한 일이었나 보다.
B급아빠는 장난스레 얘기했다.
"수화기 너머에는 말이야, 또 다른 세계가 있단다. 그곳에 사는 텔레마케터 요정들은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네가 착한 아이인지, 나쁜 아이인지 다 알고 있지. 또 뭘 좋아하고 애정 하는 TV 프로그램, 자주 하는 검색 키워드,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까지 다 알고 있어."
아이는 흠칫 놀란다. 요새 둘째는 유튜브를 보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무얼 보는지는 절대 들키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비밀유지를 했는데, 내 핸드폰을 다 아는 존재가 있다니!
"아빠도 사실... 수화기 너머에 사는 텔레마케터 요정이었단다. 20대엔 말이야."
B급아빠의 안경 너머 두 눈, 금세 아련한 회상 모드로 페이드 아웃.
"남자애들 잘 들어. 아니 여자애들도 참고 삼아 들어둬야 해.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면 열에 약한 정자가 죽어버리거든? 그러니까 한겨울에도 찬물로 샤워를 해야 해. 알았지!"
최 사장은 마치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만병통치약의 성과를 발표라도 하는 듯한 엄숙한 어조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꺼냈다. 그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던 여덟 명의 젊은 남녀들은 소심하지만 또한 명확하게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최 사장의 옆에 서 있던 해병대 출신의 건장한 이 부장의 눈꼬리가 순간적으로 꿈틀 했으나 이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몇몇은 시간차를 두고 입을 가린 채 짧은 하품을 했다.
종로의 개미집 같은 골목길 어느 귀퉁이에 자리 잡은 낡은 분홍색 빌딩의 이층에선 아침마다 최 사장이란 사람이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말들로 9시를 알리고 있었다.
아침 조례가 끝났다. 최 사장과 이 부장은 또다시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버렸고, 여덟 명에 대한 감시역을 맡은 송 실장은 웃으며 박수를 세 번 쳤다.
"여러분, 오늘도 열심히 해주세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이번 달 실적을 봐서 사장님이 회식자리를 마련하신 댔어요. 호호호~"
금방 모두들 돌아앉았다. 한둘은 목을 젖히고 입에 용각산 가루를 쏟아 넣고 있었다. 그들은 파산한 어느 동네의 독서실에서 헐값에 가져온 듯한 책상을 향하고 있었고 각자의 책상 위에는 전화기 한 대와 전산용지로 출력된 두꺼운 명부 뭉치가 놓여있었고 원활하고 자연스러운 통화를 유도할 수 있도록 통화의 기본적인 대본이 적혀있는 A4 출력지가 정면에 붙어있었다.
20대 중반의 B급아빠는 4개월째 이곳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4개월 전, 휴학을 했고 6개월 뒤에 짧은 어학연수를 다녀오겠다는 계획을 잡았다. 나라도 정했고 지역도 정했고 숙소도 정했고 서류상의 문제들도 차츰 해결해 갔고, 앗, 그런데 돈이 없었다…
B급아빠는 벼룩시장과 인터넷 게시판을 샅샅이 뒤져 그래도 월급이 높은 일을 골랐다. 그리고 텔레마케팅을 선택했다. 기본급 70만 원에 성과급이 있었다. 소심하기로 소문난 그였지만 이번에는 큰맘 먹고 종로의 사무실로 향했다. 막 겨울이 저물어갈 무렵의 일이었다.
B급아빠는 오늘 전화해야 할 리스트를 펼쳐보았다. 80학번 대, 아, 그는 X대학의 교우 명부를 판매하는 텔레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최 사장이 실제로 X대학을 나오긴 했지만 그가 제작해 판매하고 있는 교우 명부는 학교에서 제작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익금은 학교발전기금이 아니라 최 사장의 개인발전기금으로 십분 활용하고 있다.
첫 번째 대상은 화공과를 졸업한 84학번 박 아무개였다. B급아빠는 시선을 정면의 대본에 고정하고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어느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박 아무개 선배님이시죠? 안녕하세요, 무역학과 95학번(거짓말이다) 김 아무개입니다.(거짓말이다) 이번에 학교에서(거짓말이다) 개교 몇 주년 기념사업으로 교우 명부를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님이 좀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이 수익금은 학교 발전기금으로 들어가게 되거든요?(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박 아무개는 별 의심도 없고 별 망설임도 없다. 그냥 자기에게 지로용지를 보내달라고 하고, 자기 부서에 무슨 과 몇 학번 선후배가 있고 건너편 부서에는 몇 학번 선배가 있다는 사실까지 죄다 알려준다. B급아빠는 박 아무개가 말해준 목록을 급히 하얀 이면지 위에 받아 적는다. 박 아무개는 마지막으로 자기는 복수전공으로 무역학을 했다며 임 어쩌고 교수님은 잘 계시냐고 묻는다. 순간 B급아빠의 두피에서 땀 한두 방울이 삐질 흘러내린다.
"잘 계십니다.(물론 거짓말이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렇게 거절하지 못하는, 아니 거절하지 않는 박 아무개 같은 인간이 고마울 뿐이다. 그 고마움은 죄책감으로, 회의감으로 변해간다.
그날 저녁 B급아빠는 동료 몇 명과 피맛골에서 소주를 들이켰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들 모두는 어느 순간 일제히 한 숨을 쉰다. 누군가 말한다. 거짓 후배인 그들은 좋은 선배들을 두고 있다고…
귀갓길 눅눅한 라일락 향이 그래도 청춘인 그의 가슴에 빨간 약을 슬며시 발라준다. 문득 고개를 든 그는 가로등을 향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성급한 질문을 던지고 피식 웃어버린다.
몇 년 뒤, 졸업과 동시에 B급아빠는 취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갈려온다.
"안녕하세요~ 노모씨죠? 이렇게 통화하게 돼서 정말 반가워요."
수화기 너머서는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 그녀의 '동료'들 목소리가 낮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B급아빠는 자신이 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때를 생각한다. 그 추억에 버무려진 아련한 느낌들 덕에 잠시 회상에 빠져든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연다.
"그런데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있죠? 그리고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아요?"
그의 묵직하고 표독스러운 말투에 그녀, 잠시 당황한다. 그 틈을 타서 그는 깔끔하게 마무리를 한다.
"관심 없습니다."
툭! 하고 거절한 B급아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할 일을 계속한다.
전화기는 쑥스러운 듯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다.
"아빠, 나빴네!"
"정색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게?"
"아니, 텔레마케턴가 뭔가 한 거, 다 거짓말이었잖아!"
(뜨끔)
"아니, 뭐, 그게, 그냥... 예를 든 거야. 수화기 너머에도 사실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을까 해서 방금 만들어본 얘기지.(거짓말) 근데 말이야, 요샌 그 요정들이 진화를 해서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단다."
"저... 정말?"
둘째는 산타할아버지보다 더 막강한 정보력을 가졌다는 현대의 텔레마케터 요정들이 진심으로 두려운 모양 이었다. 왜일까... 도대체 둘째의 핸드폰에는 무엇이 들어있길래?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