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대신 그리움을 마신다
<그림초보의 그림단상>
가을을 알려주는 것들은 일상 곳곳에 있다.
달력의 숫자, 높고 파란 하늘, 선선한 바람,
변해가는 나뭇잎...그리고 아르페지오.
내게 가을은 아르페지오의 계절이다.
깊고 진한 보라색 아르페지오의 쌉쌀한 맛이
향수처럼 입안을 떠다니면
'아, 또 가을이 왔구나' 깨닫는다.
네스프레소의 아르페지오 커피캡슐을 한가득 사와 선반에 쌓았다.
한 계절 잘 날 수 있겠다 든든하게 부자된 기분.
도토리를 가득 주워온 다람쥐의 기분이 이와 같을까?!
캡슐 하나를 내려 커피 한 모금을 머금으면 입안 가득 가을이 퍼진다.
'그렇게 커피 대신 계절을 마신다.'
지난 가을에도 이 아르페지오를 마시며 끄적였던 문장.
그리고 이 문장을 좋아해주던 SNS 친구가 있었다.
아니, 나의 모든 글을 좋아해주었던, 나의 1호팬.
무슨 사연인지 지금은 SNS 세상을 떠난 그가
무엇이든 그립게 하는 가을의 속성을 타고 내게로 불어온다.
지금도 여전히 어렵지만 좁고 깊은 관계에 익숙한 내게
처음 랜선 위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은 막막하고 어려웠다.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네모난 모니터 화면만으로 친구가 된다는 것이 어색했다.
어느 날 부산 자갈치 시장을 정겹게 찍은
그의 사진을 계기로 그와 친구가 되었다.
처음엔 드문드문 내 글에 대한 감상을 댓글로 남기던 그가
어느 날, 어느 글에 '오늘부터 팬이 되기로 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후로 나의 모든 글을 소중하게 읽고 감상을 남겨주었다.
나의 글을 기다려주고 공감하고 격려했다.
랜선 위에서는 그렇게 가까워 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나의 첫 책인 <연남동 작은 방> 글을 막 쓰기 시작하던 때에
나중에 꼭 책으로 엮어보라 응원의 말을 전해주고
드디어 책이라는 물성으로 세상에 태어났을 때엔
교보문고로 한달음에 달려가 사 왔다며 기쁨의 말을 전하던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친구.
얼마후 그는 무슨 일인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고
그의 공간은 아직도 지난해에 머물러 있다.
내가 글을 올리면 즉각적으로 다른 이에게 닿을 수 있는
즉각적인 랜선 위의 세상은 한쪽이 사라지면 전혀 찾을 수 없는,
쌍방의 교류를 목적으로 하지만 지극히 일방적인
아이러니한 인연들의 공간이다.
얼마전 두 번째 원고를 탈고하고 출간 계약을 했다.
그래서인지 더 생각나는 나의 1호팬.
그의 따뜻한 응원이 가을의 아르페지오처럼 진하게 그립다.
그저 좀 쉬는 것일뿐, 무탈히 잘 지내고 있으리라...
오늘은 커피 대신 그리움을 마셔야겠다.
진한 커피향처럼 진한 그리움에 잠기는 오늘의 그림단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