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의 오답노트

이별 후 연애의 복기에 관해

by 중앙동 물방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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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년 동안 틀린 문제를 추려 만든 오답 노트는 실로 방대하고 치밀하여 내 안에 자리한 끈질김의 전부를 보는 것 같다. 틀린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는 건 밴드를 굳이 떼어내 환부를 살피거나 실패한 전쟁을 떠올리는 장군의 마음과도 같아서 미간을 절로 찌푸리게 한다. 그렇지만 같은 실패를 맛보지 않기 위해 반드시 선행해야 할 과제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 특별한 사람과 의미 있는 관계, 그것에서 발생하는 결과까지 모두 신기했던 당시의 나는, 관계가 끝나버린 후 헤어진 이유나 이별을 불러온 우리 안의 문제에 관해 꽤 이성적으로 복기하는 과정을 거쳤다. 사고로 인해 팔, 다리가 잘리면 그 순간엔 충격과 고통으로 아픔을 느끼는 것밖에 할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잘린 사지를 가만히 바라보는 순간이 오는데 이와 비슷하다. 끊어진 실을 다시 이어보겠다기보다 다음에 만날 사람에겐 같은 실수를 하진 않겠다는, 다음에 꼭 정답만을 맞추겠다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학창시절, 그렇게 오답 노트를 만들다 보면 정말 비슷한 문제는 다시 틀리지 않는 순간이 온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 특히 연애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비슷한 상황에서 무사통과를 한다 해도 때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유형의 문제로 미세한 균열이 생기거나 사전채점으로 고득점을 확인했는데 막상 상대방은 내게 형편없는 성적표를 내미는 경우가 있다. 왜 틀렸는지도 모르면서 어쨌든 오답을 고른 나, 이해할만한 문제풀이나 해설을 들을 수 없는 나,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틀린 결과를 통보받은 나, 그런 ‘나’들이 모여서 백지의 오답 노트를 들고 있다.

연애의 오답노트를 만들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 사실 틀렸던 문제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게 허다하다. 그런데도 시간이 지난 후 이성적으로 연애를 복기하는 건 괜찮다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무언가 대답을 들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아 결국엔 그때의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게 되는데 나에게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관계에 서툴렀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도록 한다. 비록 다음번에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 나를 시험에 들게 할지 몰라도 전에 나왔던 문제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으므로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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