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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이 Feb 27. 2024

안식월로 체크인

9월 26일, 베를린

혼자라면 가입하지 않았을 해외보험을 반려인이 들어줬다. 그간 외국여행을 하며 환전할 때 무료로 가입하는 여행자 보험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랜만에 혼자 하는 장기 여행이고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들어두면 좀 낫지 않을까. 보험은 어떤 보장을 받겠다기 보다는 모든 게 불확실한 미래에 마음 귀퉁이의 작은 안정을 위해 존재한다.


보험 서류를 받아 들고 출국 절차를 밟으려니 배웅라인이 따로 있다. 영화 속 연인처럼 어깨가 바스러질 듯한 포옹이나 격한 입맞춤 대신 손을 여러 번 흔들었다. 이거면 충분하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역설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했다. 역설적이지 않다. 혼자서 잘 있을 수 있기에 함께 사랑할 수 있다.


탑승 전까지 시간이 남아 콘센트 옆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본인 것인 줄 알고 내 충전기를 빼서 내 휴대전화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 사람은 굉장히 미안한 말투로 죄송하다고 여러 번 말했다. 외국인이 영어로 미안하다고 말했다면 "It's okay"하고 말았을 텐데 그 사람이 한국어로 말해서 내가 괜찮다는 말을 아끼는 건가 생각이 들어 괜찮다고 두어 번 말했다. 같은 상황에서 사람에 따라 굳이 다르게 행동할 필요는 없다. 휴대전화는 멀쩡했고 떨어뜨린 사람은 사과했으니까.

베를린, 정확히는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기내에서 영화 <굿바이 레닌>을 봤다. 예전에 갔던 베를린 DDR 박물관도 떠오르고 엄마가 즐겨 드시던 구동독의 피클을 찾아다니는 아들 알렉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때론 진실보다 중요한 게 있다. 소중한 사람이 오래도록 추구해 온 가치, 이는 단순히 생각을 넘어 그 사람의 평생의 삶과 잇닿아 있기 때문에 알렉스는 그걸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연결편인 베를린행 비행기를 못 탈까 봐 쉬지 않고 10분 가량 달려왔건만 밤 9시로 지연됐다. 독일 사람들 시간 잘 지킨다고 하던데 아니랍니다.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를 파는 가판대에 사람이 많다. 나는 육류를 먹지 않아 지나가며 인기만 실감할 따름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또 15분이 추가 지연됐다. 나를 베를린으로 보내달라.

 

밤 9시 23분. 드디어 베를린에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미리 예약해둔 공항 근처 숙소에 들어오니 밤 12시다. 비행 자체보다 예측이 어려운 비행 지연이 더 힘들었다.


9월 26일, 안식월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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