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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이 Mar 05. 2024

서울 신애필의 등장

9월 29일, 베를린

여행 중 지나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영화관이다. 현지인의 일상과 포개진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은 지고의 행복이다. 영화도 물론 좋아하지만, 영화관에 가면 나라와 도시의 고유한 문화를 느낄 수 있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 여행지를 회고할 때 그곳에서 본 영화와 영화관 분위기가 먼저 떠오르기도 한다. 하물며 영화제가 있는 베를린에서 영화관을 놓칠 수 있을리가.


여행하다 보면 간혹 외국영화는 아예 자국어로 더빙해서 나오는 곳도 있다. 자막을 읽지 못하거나 자막과 화면을 같이 보는 걸 꺼리는 관객을 위해서인데, 영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라면 나같은 외국인은 화면만 보다가 나오게 된다. 베를린의 비교적 큰 영화관은 영화 포스터 위에 어느 나라 영화인지, 제공되는 언어는 무엇인지 각각 적어 두어서 독어 더빙 걱정을 덜었다. 아마 베를린이라는 도시 특성 상 워낙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본 영화는 내용을 알기에 영어로 봐도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아직 개봉 전인 영화는 먼저 볼 수는 있으나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현재 극장에선 바비, 오펜하이머, 엘리멘탈과 몇 개의 독일 영화가 상영 중이다. 페미니즘을 독어로 설파하는 마고 로비? 본격 전범국가에서 보는 핵폭탄 제조 영화? 무엇이든 흥미롭다.

왼쪽은 작은 매점

그러다 숙소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아주 오래된 극장을 발견했다. 1929년에 개관해 2차 세계대전에도 파괴되지 않고 성업 중이다. 내가 좋아하는 ‘오래된 곳’과 ‘영화’의 조합, 여기에 한국에서 온 시네필의 등장이라 흥미로운데. 극장 앞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빔 앤 짐(빔 벤더스와 짐 자무쉬) 페스티벌이 진행 중이다. 내일 페터 한트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페널티킥을 앞둔 골키퍼의 불안>을 볼까 고민했는데 독일작가가 독일어로 쓴 소설을 독일 감독이 만들었으니 독일어 천국에서 과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잠시 뒤에 상영하는 영화 <천국보다 낯선>은 이미 본 터라 구미가 당기진 않았지만 좌석표를 보니 만석이었다. 상영관이 작아서 좌석이 적다고 하더라도 금요일 밤에 이렇게 옛날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니 역시 베를린 시네필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 두 시간 뒤인 밤 10시에 상영하는 짐 자무쉬의 <미스테리 트레인 Mystery Train, 1989>을 예매했다. 직원은 매점에 한 명밖에 없고 티켓은 키오스크로 사야한다. 이 영화마저 만석! 대체 당신들은 어떤 사람인가.

기획전 위주로 상영하는데 기획전 포스터는 무료로 가져갈 수 있다

50명 남짓 들어가는 아담한 크기의 상영관에 관객들이 복작복작하게 앉아있다. 오른쪽에 앉은 여자는 매점에서 산 독일 병맥주를, 그 오른쪽 커플은 역시 같은 매점에서 산 옛날식 얇은 종이봉투 팝콘을 들고 있다. 모두 자기 집 거실에서 영화 보듯 편안한 분위기라 마음이 놓인다. 미스테리 트레인은 퍽 유쾌했다. 첫 번째 에피소드 빼고는 배우들이 영어로 말했는데, 독어 자막은 나오지 않았다(일본어 대사는 영어로 제공) 근데 영어 대사에 잘 웃는 걸 보면 여기의 삼분의 일은 외국인이거나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 같다.


아, 게르만의 후예는 상당히 거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앞에 앉은 아저씨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서래만큼 꼿꼿했는데 덕분에 나도 1시간 반 가량 목석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1929년에 생긴 영화관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개봉했던 영화를 50명 남짓의 사람들과 보았다. 영화가 끝나니 밤 열두시 반. 기분 좋은 바람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스크린에서 내내 흘러나오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미스테리 트레인을 틀고 흥얼거리며 집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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