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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이 Mar 07. 2024

어떤 그림을 가져가시겠습니까

많은 것을 한 번에 즐기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물며 여행은 하고 싶은 것에 비해 늘 시간이 부족하다. 나 역시 시침질하듯 하루를 촘촘히 여행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나니 무엇이 남았던가. 내게 필요한 건 어딘가 다녀왔다는 발도장이 아니었는데.


베를린에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많고 이런 곳을 한 번에 돌아볼 수 있는 뮤지엄 패스도 있지만, 나는 하루에 딱 한 곳만 간다. 한정된 에너지와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하여 내 방식대로 작품을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다음은 어제부터 이틀 간 다녀온 베를린 미술관에 대한 기록이다.

 

먼저 베를린 국립회화관gemäldegalerie. 전시실은 일흔 두 개인데 내 집중력과 체력의 한계는 최대 2시간 반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관절이 사브레 쿠키처럼 와그작 소리를 내며 부서질 것 같고 뭉크 말고 뭉크 할아버지가 와도 도무지 그림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일단 지도를 받아 숲 속에서 빵 조각을 떨어뜨리며 길을 잃지 않으려는 헨젤의 심정으로 전시실 번호를 확인하며 들어갔다.

 

잘 모르는 작품이 많으면, 미술관이 선정한 작품을 먼저 본다. 그러다보면 마음이 맞는 작품을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낯선 곳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만날 때의 기쁨도 놓칠 수 없다. 혼자 지인 결혼식에 갔는데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 같다. 내겐 조반니 안토니오 까날Giovanni Antonio Canal이 그랬다. 베네치아의 풍경을 제대로 담기 위해 매일 같은 자리에 나와서 바라보았을 화가의 모습과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이 그림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진다.


“멋있다” “사진 같다” 이런 단순한 표현이 아닌, 내가 그 작품에 왜 이끌렸는지를 좀 더 소상히 생각해보면 나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들을 한데 모아놓고 생각할 때 자신을 더 면밀히 탐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인상주의 화가의 풍경화를 좋아하는데 그중 사람이 없는 풍경화에서 더욱 마음이 놓인다. 내가 사는 곳은 늘 사람이 많고 좋든 싫든 실타래처럼 엉켜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Alte nationalgalerie에선 분리주의파 기획전이 진행 중이었다. 대부분 클림트에 인파가 몰려 있었으나 막스 리버만Max Libermann이라는 베를린 출신의 화가를 알게 됐다. 나중엔 전시실에서 막스 리버만의 그림을 찾아보라면 고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화풍에 매료됐다. 색감과 선이 지나치게 강렬하지 않고 분위기가 따스하다. 특히 사람이 있는 풍경화 앞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화가가 그 인물들과 나누었을지 모르는 감정의 교류가 내게 어렴풋하게 다가와 그 현장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책이나 휴대폰 화면에서 손톱만한 크기로 보던 유명 작품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여행의 장점이다. 하나 나는 그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화가나, 무엇보다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화가가 해당 지역을 그린 작품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베를린이 고향이자 터전이었던 막스 리버만의 베를린 풍경이 그렇다. 비단 여기에 살지 않았더라도 유명 화가가 그 지역에 잠깐 와서 그곳을 그렸다면 지역 미술관은 어떻게 해서든 그 그림을 사들이는 데에 사력을 다한다. 이 그림은 그 지역을 벗어날 일이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 우리는 화가가 그린 이 지역의 옛날 풍경을 통해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의 과거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철저히 주관적이면서도 애정이 담긴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까.

 

이곳에서 단 한 작품만 골라 집에 가져갈 수 있다고 상상해보고 갤러리를 둘러보았다. 좀 더 흥미롭게 전시실을 돌아볼 수 있는 나의 비책이다. 어디에 팔 수 없고 단지 ‘내 집 거실에만 둘 수 있는’ 이라는 단서를 붙이면 나만의 기준으로 그림을 살펴보게 된다. 나는 대개 나의 집 창 밖에서는 보기 힘든 초록빛 숲이나 윤슬이 가득한 바다가 그려진 풍경화를 고른다.



9월 30일, 베를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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