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는 아니다. 하지만 여행하면서 교회나 성당은 들어가 본다. 절과 이슬람 사원에 간 적도 있다. 어쩌면 신자가 아니기에 배우는 마음으로 겸허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닐지.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는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파괴된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전쟁의 비참함을 기억하기 위해 남겨 두었다는데 반성인걸까 아니면 우리도 피해를 입었다는 호소인 걸까. 당위성 있는 전쟁은 없으며 전쟁을 시작한 이들의 최후를 보여주는 듯하다. 베를린에선 자기의 과오를 마주하는 태도에 관해 숙고하게 된다. 수도 복판에 자리한 유대인 추모 공원도 그중 하나다.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한번 일어난 일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기에, 잘못을 인정하고 오래도록 기억하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로 들어가 초에 불을 붙이며 기도했다. 초에 불을 붙이려면 기부해야 하는데 아이들은 꺼진 불을 다시 켜는 데 재미를 붙여 온 세상 불을 다 켤 작정이다. 고작 1유로지만 나치 희생자들의 명복과 내 야구팀의 우승을 빌었다. 아무래도 신자유주의 시대니 돈을 안 낸 사람보단 조금이라도 낸 사람의 간절함을 높게 평가해 먼저 들어주지 않겠는가
(하지만 더 많은 기부금을 낸 사람의 소원에 밀려 아직 수리가 안 되었는지 일기를 쓰는 오늘 내 야구팀은 5연패의 수렁에 빠졌다)
월요일인데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박물관은 열려 있었다. 케테 콜비츠는 독일 여성 예술가로 판화, 조각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구 내셔널갤러리에서 알게 된 화가 막스 리버만과 같은 시기에 분리주의파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녀는 죽음, 여성, 어머니, 아이들, 반전(反戰), 가난에 관심이 많아 이를 여러 판화와 조각으로 만들었다. 열여덟 어린 아들을 전쟁으로 잃은 터라 더욱 그럴 것이다. 과거 국가가 행한 폭력이나 참사로 소중한 이를 잃었던 이들이 다른 참사의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오늘 소셜미디어에선 한 누리꾼이 뮤지션에게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말라고 했다. 창작자는 발 닿은 곳에서 시대를 늘 정면으로 마주한다. 시대를 관통하며 겪는 모든 것을 글, 그림, 노래 등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위로하며 때론 분노하는 게 그의 업이다. 그런 이에게 정치적인 말을 하지 말라는 그 말이 얼마나 정치적인지 누리꾼은 우매함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그런 소리를 할 바에야 나가서 산책도 좀 하고 좋은 노래나 들었으면 한다.
어제 시내를 돌아다니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서 천장이 있는 구조물 아래로 대피했다. 그곳엔 이미 사람은 물론 대형견들까지 비를 긋기 위해 팽이버섯마냥 모여 있었는데, 바로 거기가 전쟁과 독재에 희생된 사람을 위한 추모관인 노이헤 바헤Neue Wache였다. 그리고 그 안에 케테 콜비츠의 조각이 있었다.
10월 2일, 베를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