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거 혹시 복선이었나' 싶은 게 있지 않나.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질 때 스쳐 지나가는 비라 여기고 우산 대신 모자를 챙긴 것. 방에 들어올 때마다 잘 열리지 않아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카드키와 방의 문고리가 내겐 그랬다.
미술관에서 나왔을 때는 비가 퍽 요란하게 퍼붓고 있었다. 미처 거두어 들이지 못한 옥상 위의 빨래처럼 축축한 상태로 역 근처 타코가게에 들렀다. 과카몰리까지 추가한 타코를 야무지게 먹을 생각이다.
먼저 이 호텔 문에 관해 알아둘 게 있다. 숙소와 방으로 들어올 때 총 두 번, 카드키를 접촉해야 한다. 전형적인 호텔이 아니라서 방 문에 카드키를 댔을 때 초록불이 들어오면, 위에 있는 손잡이는 시계방향으로 돌리고 아래 손잡이는 동시에 앞으로 밀어야 열린다. 하여 문 앞에서 자주 머뭇거렸다.
한 손엔 타코를 들고 오늘도 여지없이 방의 문을 여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서 보니 카드키에 금이 가 있었다. 플라스틱 카드가 살짝 깨진 것이다. 자세히 보여야 보일 정도라 대수롭지 않게 카드키를 다시 댔는데 더는 초록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카드가 개복치도 아니고 난감하다. 이제 이 카드로 할 수 있는 건 말벌에 쏘였을 때 독침을 빼는 것 정도 아닐까.
호텔엔 상주 직원이 없어서 바로 응대해줄 사람이 없었다. 지금은 저녁 9시 15분, 호텔 매니저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지만 과연 이 시각에 연락해도 되는 걸까. 순간 머릿 속에 ‘독일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저녁 9시 이후 연락’ 이런 문구가 떠올랐다. 한참 고민하다 별다른 수가 없어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과연 그는 언제 이 메시지를 볼까. 오늘 중으로 보긴 볼까. 나는 단지 타코를 먹고 싶었을 뿐인데. 10월의 바람소리가 유독 을씨년스럽게 들리는 컴컴한 호텔 로비에 앉아 쓸쓸히 타코를 먹었다. 타코를 먹는 20분 동안에도 답은 오지 않았다. 그의 답장이 오기 전까지 호텔 맞은편의 펍에서 맥주나 한 잔 하며 기다릴까.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지금 최악의 경우는 호텔 로비에서 잠들기지만, 호텔 밖을 나서면 그때부턴 베를린 시내 노숙으로 바뀐다. 이제 다음 플랜으로 넘어간다. 바로 전화걸기.
고심 끝에 전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되지 않았다. 이심 때문에 걸리지 않는 듯하다. 고로 나는 매니저 안토니오가 애인과 함께 맥주를 연거푸 마시다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 휴대폰을 들고 갈 때 심각한 사태를 토로하는 내 메시지를 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위층에 올라가 다른 객실 문을 두드리고 투숙객의 전화를 빌려 안토니오에게 SOS 전화를 보내야 할까. 이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내 눈은 빠르게 로비에 누울만한 널찍한 의자와 화장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문자를 보낸 뒤 40분 경과, 밤 10시가 되어 안토니오에게 전화가 왔다. 연신 미안하다고 하는 내게 그는 괜찮다며 카드키가 원래 약해서 자주 있는 일이라고 안심 시켰다. 그는 마스터키가 있는 곳을 알려줬고 나는 그것으로 안온한 나의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텅빈 타코 박스 아래 따로 비용을 내고 구입한 과카몰리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10월 3일 독일통일의 날, 베를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