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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이 Mar 26. 2024

고도 아니 점원을 기다리며

아무리 좋은 도시라도 때가 되면 떠나는 게 여행자의 숙명이다.

 

베를린역에서 밤베르크행 기차를 탔다. 마지막까지 위를 베를린의 무엇으로 채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맥주 베를리너 킨들과 프레첼도 샀다. 도시와 천천히 작별하고 싶다면 기차에서 역방항 좌석에 앉는 것을 추천한다. 눈에 익은 풍경들이 머리 뒤로 스쳐 지나가면 마음이 한껏 아련해진다. 다만 멀미에 강한 사람에 한해서만. 자리에 앉아 책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les>를 펼쳤다. 기차처럼 노출된 공간에서 이런 책을 읽어도 되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옆에 앉은 노부부는 각자 할 일을 했다.


베를린이라는 큰 도시에서 시간을 보냈으니 상대적으로 작고 조용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작은 도시의 기준은 마을의 이쪽부터 저쪽까지 걸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가다. 밤베르크에 숙소를 잡고 여기보다 좀 더 큰 도시인 뉘른베르크를 다녀올 예정이다.

 

베를린에서 잊고 있었던 것이 밤베르크에 오니 떠올랐다. 오랜 세월 그 지역의 풍경과 하나가 된 옛 가옥들, 마을 가운데 있는 광장과 성당, 저녁 7시만 되어도 문을 닫는 가게, 문을 닫을 지라도 최소한의 등을 켜놔 길을 어둡지 않게 만드는 마음. 그렇게 불이 켜진 곳을 보며 내일 이곳에 와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베를린은 밤에도 늘 레스토랑과 펍이 북적였는데 여긴 부드러운 적요만이 감돌뿐이다. 그 가게 앞만 빼면.

 

밤베르크는 라우흐 비어Rauchbier, 일명 훈연맥주로 유명하다. 조용히 산책하다 어느 순간 축제하나 싶을 정도로 유독 한 골목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처음엔 단체 손님들이 밥을 먹고 나왔나 했는데 이 지역의 대표 훈제 맥주 펍 앞이었다. 사람들은 라우흐 비어를 테이크아웃해 거리에 나와 마시면서 얘기한다. 음식을 먹지 않는 이상 굳이 레스토랑 안에 있을 필요도 없고, 자리도 많지 않으니 그냥 거리에 나와 사람들이랑 서서 마신다. 관절과 방광이 튼튼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사람이 너무 많아 가게 입구가 어딘지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베를린에선 어딜 가나 영어나 스페인어 같은 독일어가 아닌 언어들이 들렸는데 밤베르크는 오직 독일어뿐이다.

 

훈제맥주는 아니지만, 자기네만의 양조기술로 특별한 맥주를 파는 펍에 와서 이 글을 쓴다. 독일의 일반 레스토랑에서는 모든 게 한국보다 오래 걸린다. 서울은 지하철 개찰구에 들어갈 때 앞에 있는 사람이 교통카드가 잘 안 되는 것 같으면 바로 옆 다른 개찰구로 이동하고, 비행기에서 내릴 때에도 어느새 사람들이 가방까지 메고 복도에 서 있지 않은가. 그만큼 모든 걸 빠르게 하는 게 익숙한데 여기선 레스토랑에 입장해서 메뉴를 받기 전까지 한번, 메뉴를 받고 주문하기까지 한번, 음식 나오기까지 한번, 다 먹고 계산하기 전까지 한번 총 네 번 손님이 아닌 가게의 속도에 맞춰진다. 처음엔 메뉴를 안 주거나 음식이 늦게 나오면 답답하기도 하고 혹시 나를 못 본 건가 불안했다. 며칠 지나니 이 속도에 적응해 직원이 다가오기까지 열심히 노트에 일기를 쓴다. 여기에 올린 일기는 내가 카페나 음식점, 펍에서 고도를 기다리듯 점원을 기다리며 쓴 글이다. 기다림은 내 글의 배터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0월 5일, 밤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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