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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이 Apr 09. 2024

유난히 내성적인 아시아계 유학생

여행지가 어땠는지 좌우하는 건 여러가지가 있지만, 나에겐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다. 물론 만난 이들이 그 나라를 대변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 떠올려보건대 짧은 머뭄 속 우연히 만난 현지인들과 나눈 얘기가 맥주의 맛이나 미술관의 그림보다 퍽 오래도록 남아있다.

 

드디어 밤베르크의 자랑, 훈연맥주를 마시러 왔다. 며칠 전 이곳에 도착했을 때 사람이 너무 많아 입구를 찾을 수 없었던 바로 그 펍이다. 맥주를 받아 앞에 있는 큰 테이블에 앉았다. 동행인끼리 앉는 한국에선 이렇게 비어 있어도 앉지 않는 게 일반적이나 독일에 온 지 2주가 되어가니 눈치로 알았다. 펍 같은 곳은 처음 보는 이와 합석이 자연스러운 편이다. 이걸 몰랐을 땐 이방인의 눈에 독일인이 단체회식을 매우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옆에 앉은 활발한 중년 여성이 "Prost!(건배)" 하고 외쳐서 다같이 잔을 부딪혀 건배했다.

밤베르크 훈연맥주Rauch Bier

어느새 만석이 된 10인용 테이블, 가만히 둘러 보니 나를 제외하고 모두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다. 문득 이 테이블에서 2차 세계대전 종전 소식을 라디오 생방송으로 듣지 않은 사람, 베를린 장벽 무너지는 모습 못 본 사람 손가락 접어! 하고 손병호 게임을 하면 내가 제일 먼저 잔을 비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옆에 있는 밤베르크 출신 할머니가 묻는다. 독일어 할 줄 아니? 조금요. 여기서 공부하는 거야? 아뇨 여행해요.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면서 좀 더 가까이 대고 얘기하라고 하셨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에서 말했는데 여전히 못 알아들으셔서 휴대폰으로 '여행'이란 독일어 단어를 쳐서 보여드렸다. “내가 노안이 와서 이건 안 보여” 그렇게 대화 종료.


맥주를 몇 모금 마시고 다시 "저는 한국인이에요"를 독어로 말해보았다. 이번에는 알아들으셨다! 독어를 배워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5분 뒤 할머니로부터 


“아 네가 차이니즈라고?” 말을 듣기 전까진.


저녁엔 밤베르크 교향악단 공연에 왔다. 베를린과는 달리 소도시라 그런지 클래식을 좋아하는 주민들끼리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공연 시작 전, 서로 눈을 맞추고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내 양 옆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앉았다. 젊은이 대부분이 베를린이나 뮌헨 같은 큰 도시로 떠나서일까. 독일에서 클래식은 어르신들의 즐거움일까. 고령화 사회는 한국과 일본만의 일은 아니기 때문일까. 이유야 어떻든 공연 며칠 전부터 설레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가 옷장을 열고 반듯하게 다려진 옷을 골라 입었을 어르신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인터미션 때 장내 안내방송이 나왔는데, 오른편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방송을 가리키며 내게 무슨 말을 했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Ja(네)~” 하고 고개를 두어번 주억거렸다. 밖에 나갔다 들어온 왼쪽 할머니는 공연이 끝날 때쯤 내게 엄청 길게 말을 건넸다. 내가 예, 아니오가 아닌 갖춰진 답변을 해야 하면 문제가 됐겠지만 그게 아니었는지 “Ach so!(아 그렇구나 라는 의미)” 한 게 자연스레 대화로 이어졌다(말을 몇 마디 더 하셨다) 할머니들한테는 내가 말수가 적은 아시안 유학생 정도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여나 그 말을 이해하려고 영어로 묻는다면 괜히 실망감을 안겨 드릴 것 같아서 말수 적은 유학생으로 남기로 했다. 세상엔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법.



10월 7일, 밤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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