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떠들지 말라는 엄숙한 안내문은 나만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한국의 무궁화호 같은 지역 열차 안, 잠이 확 달아나는 요란한 휴대전화 벨소리는 기본 다들 “내 억울한 사정 좀 들어보소” 하듯 통화한다. 이렇게 시장통 같은 기차를 타고 40여분을 가니 뉘른베르크Nürnberg에 도착했다.
뉘른베르크는 나치가 세력을 구축하고 확장하는 주요 거점 도시였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범자들 재판이 진행되기도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기념관이다. 종전 후 전범 재판의 진행 과정과 재판에 참여한 이들 그리고 재판이 시사한 바를 상세히 보여준다. 재판이 이곳에서 열린 까닭은 나치의 주요 거점지여서가 아니라, 재판 관계자가 상당히 많고 재판 기간도 길었는데 이런 대규모 재판을 진행할 만한 곳이 여기뿐이었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는 이로써 나치 연관검색어에 가장 상단에 등장하는 도시가 됐다.
당시 자료를 보면 나치당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당원 집회의 규모도 엄청났다. 따라서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하여 이 반인륜적인 범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독일인은 별로 없다. 많은 이가 수용소에 끌려가서 죽음이나 그에 준하는 고통을 겪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내가 아니기에 침묵하고 외면했다. 특히 당시 뉘른베르크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무지근한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베를린의 유대인추모기념관과 폴란드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 수용소와는 다르게 이곳은 재판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춰 한발짝 떨어져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증인이 필요하지 않았던 재판임에도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증인으로 이곳에 와서 재판을 참관하고 기꺼이 증언했다. 법정에 나와 가해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나 자신이 바로 그 증거라고 말했을 생존자들의 마음은 가늠조차 조심스럽다.
재판에 참여한 미국 검사(로버트 H 잭슨)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우리가 그들을 심판하지만, 내일부턴 역사가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죄가 어떠한 건지 알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법에 의거해 공정하고 정당한 판결을 내리겠다.”
하나 그 공정함이 결과적으로는 꽤 야속하게 느껴진다. 기소된 이들 중에서는 짧은 형을 마치고 나와 90살까지 산 놈도 있고, 무죄를 받은 놈도 있다.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우주를 단 한 순간에 파괴해버리고는.
기념관에서 나와 뉘른베르크 시민들을 본다. 그들의 얼굴은 잠든 아기처럼 평화롭다.
10월 6일, 밤베르크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