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네이 Mar 21. 2024

서울엔 없고 베를린엔 있던 것

지하철을 타려는데 역 앞에 독일어가 잔뜩 쓰인 검은 안내판이 보였다. 아우슈비츠와 다하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상단의 문구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공포스러운 지역’. 그 수가 생각보다 많고 아래 두 지역은 최근에 추가된 것 같았다. 하필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역에 들어가다 말고 사진을 찍으니 행인들도 멈춰 서서 함께 본다. 부자로 보이는 이들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안내판에 대해 설명한다.


반유대주의와 인종차별주의가 점점 커지는 시대, 국가사회주의체제의 공포와 희생자에 대한 기억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녹색당과 독일사회민주당이 만들었다. 비텐베르크플라츠Wittenbergplatz역은 베를린에서 오래된 역 중 하나로 카데베KaDeWe라는 고급 백화점이 있어 유동인구가 많다.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잘 보이도록 안내판의 위치를 옮겨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모든 독일인이 베를린 곳곳에 있는 이런 구조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는 알기 어렵다. 괜한 일을 한다거나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명판이 그 역의 그림자가 될지언정 마땅히 해야 한다고 믿고 나서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주변에 가시화되고 익숙해지면 인식과 반성은 기본값이 된다.


베를린에서는 지하철을 많이 타고 다녔는데, 역마다 서로 다른 글자체와 인테리어로 되어 있어 역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 이쪽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착각이 들 정도다. 서울 지하철에선 졸다가 깨면 밖의 풍경으로 현재 역이 어디인지 알기 어려운 것과 상반된다. 베를린은 동독과 서독이었던 지하철역들의 모습이 모두 다르고 통일 이후에도 각 역사를 토대로 잘 보존했다. 비단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마다 특색있는 역의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해 지하철 여행을 해보고 싶다.


베를린의 트램은 보도와의 단차가 크지 않고 유아차와 자전거, 휠체어 등의 탑승 공간이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다. 대중교통 안에서 아쉽게도 휠체어를 많이 보진 못했으나 거리에는 확실히 휠체어 이용자들이 서울보다 많이 보인다. 아마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면 베를린도 한계가 있겠지만 말이다. 단차를 낮추면 휠체어, 유아차 이용객 뿐만 아니라 키가 크지 않은 사람, 어린이, 다리가 불편한 사람 등 모두에게 훨씬 편하다. 사회시스템의 기준을 약자에게 맞춰야 하는 이유다.


베를린에 있는 동안 매 끼니를 채식으로 흔쾌히 할 수 있었다. 간판에 스테이크를 크게 내건 식당이어도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가 두어개쯤 있다. 고기 안 들어가는 요리 하나 넣는 게 뭐 대수라고 우리가 채식주의자 고객을 잃어야 하나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고기를 왜 먹지 않냐고 묻는 대신, 다양성을 인정하고 여러 메뉴를 구성하면 선택지가 많아져 모두에게 득이다. 한국에선 있다가 사라진 버거킹 채식 와퍼도 KFC에도 채식 메뉴가 있다. 특히 베트남, 태국 등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비건 레스토랑이라는 카테고리를 점령해 지역 주민을 포함 외국인 손님까지도 사로잡았다.


베를린이 사람이라면 옷깃을 붙들고 늘어지고 싶을 만큼 못 견디게 아쉽다. 외국인이 일주일간 서울을 여행한다고 한국을 다 알 순 없듯 나도 마찬가지다. 수도는 그 나라의 많은 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지만, 수도이기 때문에 가장 그 나라답지 않은 모순이 있다. 내일은 밤베르크로 떠난다.


10월 4일, 베를린





이전 08화 베를린 노숙 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