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애필의 등장

by 중앙동 물방개

여행 중 지나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영화관이다. 현지인의 일상과 포개진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은 지고의 행복이다. 영화도 물론 좋아하지만, 영화관에 가면 나라와 도시의 고유한 문화를 느낄 수 있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 여행지를 회고할 때 거기서 본 영화와 영화관 분위기가 먼저 떠오르기도 한다. 하물며 영화제가 있는 베를린에서 영화관을 놓칠 수 있을리가.


여행하다 보면 간혹 외국영화는 아예 자국어로 더빙해서 나오는 곳도 있다. 자막을 읽지 못하거나 자막과 화면을 같이 보는 걸 꺼리는 관객을 위해서인데, 영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라면 나같은 외국인은 화면만 보다가 나오게 된다. 베를린의 비교적 큰 영화관은 영화 포스터 위에 어느 나라 영화인지, 제공되는 언어는 무엇인지 각각 적어 두어서 독어 더빙 걱정을 덜었다. 아마 베를린이라는 도시 특성 상 워낙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본 영화는 내용을 알기에 영어로 봐도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아직 개봉 전인 영화는 먼저 볼 수는 있으나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현재 극장에선 바비, 오펜하이머, 엘리멘탈과 몇 개의 독일 영화가 상영 중이다. 페미니즘을 독어로 설파하는 마고 로비? 본격 전범국가에서 보는 핵폭탄 제조 영화? 무엇이든 흥미롭다.

DAY4_3.jpg 왼쪽은 작은 매점

그러다 숙소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아주 오래된 극장을 발견했다. 1929년에 개관해 2차 세계대전에도 파괴되지 않고 성업 중이다. 내가 좋아하는 ‘오래된 곳’과 ‘영화’의 조합, 여기에 한국에서 온 시네필의 등장이라 흥미로운데. 극장 앞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빔 앤 짐(빔 벤더스와 짐 자무쉬) 페스티벌이 진행 중이다. 내일 페터 한트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페널티킥을 앞둔 골키퍼의 불안>을 볼까 고민했는데 독일작가가 독일어로 쓴 소설을 독일 감독이 만들었으니 독일어 천국에서 과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잠시 뒤에 상영하는 영화 <천국보다 낯선>은 이미 본 터라 구미가 당기진 않았지만 좌석표를 보니 만석이었다. 상영관이 작아서 좌석이 적다고 하더라도 금요일 밤에 이렇게 옛날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니 역시 베를린 시네필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 두 시간 뒤인 밤 10시에 상영하는 짐 자무쉬의 <미스테리 트레인 Mystery Train, 1989>을 예매했다. 직원은 매점에 한 명밖에 없고 티켓은 키오스크로 사야한다. 이 영화마저 만석! 대체 당신들은 어떤 사람인가.

DAY4_2.jpg 기획전 위주로 상영하는데 기획전 포스터는 무료로 가져갈 수 있다

50명 남짓 들어가는 아담한 크기의 상영관에 관객들이 복작복작하게 앉아있다. 오른쪽에 앉은 여자는 매점에서 산 독일 병맥주를, 그 오른쪽 커플은 역시 같은 매점에서 산 옛날식 얇은 종이봉투 팝콘을 들고 있다. 모두 자기 집 거실에서 영화 보듯 편안한 분위기라 마음이 놓인다. 미스테리 트레인은 퍽 유쾌했다. 첫 번째 에피소드 빼고는 배우들이 영어로 말했는데, 독어 자막은 나오지 않았다(일본어 대사는 영어로 제공) 근데 영어 대사에 잘 웃는 걸 보면 여기의 삼분의 일은 외국인이거나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 같다.


아, 게르만의 후예는 상당히 거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에 앉은 아저씨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서래만큼 꼿꼿했는데 덕분에 나도 1시간 반 가량 목석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1929년에 생긴 영화관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개봉한 영화를 50명 남짓의 사람들과 보았다. 영화가 끝나니 밤 열두시 반. 기분 좋은 바람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스크린에서 내내 흘러나오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미스테리 트레인을 틀고 흥얼거리며 집으로 걸어간다.



9월 29일,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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