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날이 밝으면 좋아하는 가수가 달라져있는 친구가 있었다. 한 아이돌만 지독하게 파는 아이는 그를 잡팬이라고 부르며 비아냥대기도 했다. 꼭 한 명만 좋아해야 하나. 한 우물만 오래 파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인가. 별안간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하이델베르크 역에서 내려 호텔로 가는 동안 이곳과 사랑에 빠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1위에 있던 밤베르크를 밀어내고 하이델베르크가 실시간 급상승 도시가 됐다. 좋아하는 지역이나 사람을 마음 속에 여럿 둔들 아무 문제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내 안에 나눠줄 사랑이 많다는 의미일 지도 모른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도시에 뭉근하게 깔린 여유로운 분위기, 24도의 적당한 기온과 화창한 날씨, 유서 깊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재잘거림까지 하이델베르크의 첫 인상은 온화하다.
독일에 온 뒤로 땅을 보러 온 사람처럼 어디가 살기 좋을지 둘러보는데 어딜 가든 독일에서 살고 싶다면 두 가지를 잘해야 한다. 바로 독일어와 자전거 타기다. 코펜하겐에서도 자전거 부대를 많이 봤으나 독일도 만만치 않다. 밤베르크에서 만난 독일인 알렉스가 말했듯 여긴 자전거, 아기, 개가 모두 같은 비용을 내고 기차를 타는 나라라서 넘어지지 않고 빠르게 페달을 밟는 것만으론 잘 타는 축에 낄 수 없다. 두 손을 놓고 독일 국민빵 프레첼 정도는 편하게 먹으면서 탈 수 있어야 한다.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을 가기 위해 구시가에 왔다. 헤겔과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가 이곳을 산책하며 명상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교토에 있는 철학자의 길과 비슷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뿔싸. 철학자의 길에 가려면 먼저 엄청 꼬불꼬불하고 가파른 뱀의 길을 올라야 한다. 클라이밍과 트래킹 같은 액티비티와 꾸준히 거리두기 하는 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출발점에서 만난 세 명의 인도계 친구들과 숨을 몰아쉬며 올라갔다. 당시엔 이렇게 길이 정비되어 있지도 않았을 텐데 대체 어떻게 올라온 걸까. 사유에도 역시 체력과 관절이 뒷받침 되어야 하나 보다. 철학 두 번 했다가는 도가니가 다 나갈 것 같은데.
어쩌면 이 구불구불 험난한 길 덕분에 방해하는 이가 없어서 사색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
“헤겔씨, 제가 요새 되는 일이 없어서 자문을 좀 구하고 싶은데요.”
“어어 그래? 뱀의 길 타고 올라오면 보이는 꼭대기 집 있지? 거기로 오게나”
그 후로 상담 요청이 오지 않았고 헤겔은 조용하고 한갓진 오후를 보낼 수 있었다.
독일 철학자들이 전국민 오운완(오늘도 운동 완료) 본부와 협약을 맺어 이런 등산길을 산책로로 만든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체력의 한계가 느껴지는 길이었다. 다만 몸이 힘드니 사사로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르는 동안 비운 머릿속에 다시 의미 있는 것들로 채워나가야겠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거나 고민이 있을 때 자주 걷는다. 노트북 모니터 앞에선 떠오르지 않던 것이 산책을 하면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생각이 피어난다. 모래주머니를 단 듯 가없이 무겁게 느껴지던 고민도 천변의 오리를 보면 걱정이 수용성인가 싶을 정도로 용해된 느낌이 든다. 비단 유명한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각자 동네의 좋아하는 길을 걸으며 자신이 지금 원하는 게 뭔지 차분히 짚어볼 수 있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이러한 시간이 쌓여 지금 내 속을 단단히 여물게 했다고 믿는다.
올라올 때 보았던 뱀의 길 어귀에서 책을 읽고 있던 청년도 이제 어둑해진 탓에 글자가 보이지 않아 책을 덮고 있다. 사뭇 가벼워진 몸과 다리로 오던 길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10월 13일, 하이델베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