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하는 자에게 가장 강력한 상대는? 바로 싸우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다. 이기기는커녕 시합조차 시작할 수 없다.
아침에 일어나 호텔 수영장에 왔다. 팔을 서너 번 저으면 레인이 끝나는 작은 수영장 안에는 중년 여성뿐이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수영 강국 출신의 물방개 실력을 보여주마! 나는 누구보다 빠르고 남들과는 다른 자유형을 선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줄곧 잔잔한 평영만 하더니 할 만큼 했는지 썬 베드에 올라가 영상통화를 한다. 나는 이길 수 없었다. 아무도 나와 경쟁하려 하지 않았기에 하릴없이 물 속에서 자신과 싸움을 이어 나갔다.
독일에 온 지 3주째, 이젠 점심 때 맥주를 마셔도 괜찮은지 고민하지 않는다. 독일은 그런 사람들이 차고 넘쳐서 수차례 눈에 밟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은 맥줏집 들어가는 시간만 늦춘다. 독일 전통 음식인 플람쿠헨Flammkuchen을 먹다가 느끼함을 덜기 위해 양배추 절임Sauerkraut를 주문했다. 양배추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독일의 김치 같은 요리다. 간장 종지에 담겨 나올 줄 알았으나 아, 이곳은 독일이었지! 할머니댁에 갔는데 내가 잘 먹으니 집에 가서 두고 먹으라고 싸주는 거대한 양이었다. 자우어크라우트의 맛은 정말 묵은지와 유사하다. 여행하다 보면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나라에서도 이렇게 비슷한 맛을 가진 요리를 발견한다. 나라를 불문하고 맛의 균형을 잡으려는 보편적인 마음 때문이 아닐까. 언젠가 독일인이 한국에서 묵은지를 먹으며 고국을 떠올렸으면.
하이델베르크 대학 도서관에 가려고 지도에서 일러준 대로 찾아갔는데, 공사가 한창인 건물이 나왔다. 이게 그 대학이 맞나 싶은데 젊은 친구들이 자꾸 들어가기에 입구를 알았다. 금방 무너져 내릴 듯한 건물에 “저희 영업합니다”가 써있는 인터넷 화제의 사진을 실제로 본 것 같다.
베를린에서 훔볼트대학 도서관에 간 적이 있어서 들어가는 순간부터 마인드 컨트롤 한다. ‘나는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학생. 와, 시험 언제 끝나냐. 공부 너무 지겹다. 어휴 이 공사하는 것 좀 봐. 유서 깊은 대학이라 공사도 700년째 하네. 지긋지긋한 공부, 공사.. 공으로 시작하는 건 공유 빼고 다 별로야’
괜히 두리번거리지 않고 게시판이 있으면 룸메이트 구하나 싶어서 괜히 고민스러운 얼굴로 훑어본다. 영어로 된 안내문이 있어 읽어보니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재학 중인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독일어 수업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책이나 자료 등을 훔치는 사람이 있어선지 학생들은 해파리처럼 속이 훤히 보이는 투명 가방을 들고 다닌다. 저 가방까지 있으면 더욱 여기 학생 같겠는걸 기념품으로 하나 사갈까 잠시 고민해본다.
반려인에게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학생으로 빙의해 도서관에 간 얘기를 하니 건물 앞에 나와서 있으면 하이델베르크 전기전자공학과라도 만나는 거 아니냐며 좀 기다려 보란다.
10월 14일, 하이델베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