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쩍 끼워둔 책갈피처럼

by 중앙동 물방개

“여행 가서도 수영을 하신다고요?” 지인이 물었다. 수영하기 위해 여행가는 건 아니지만, 여행을 간 김에 할 수 있으면 한다. 일상의 루틴인 수영을 여행지에서 하면 낯선 곳에서도 안정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외국 수영장은 대개 정보가 적기 마련이고 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날 변수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걱정을 먼저 누그러뜨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츠는 언어 위에 존재하지 않나. 올림픽 같은 국제 대회가 그렇다. 대회의 규칙만 잘 지키면 수영 자체는 별다른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 말로 싸우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학술대회 보단 수영대회를 나가는 게 상대적으로 간단하지 않을까(물론 유의미한 기록 획득은 다른 문제다)


한국의 공립 수영장은 대부분 지하에 있다. 수영장을 지하에 두면 지상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구조적인 안정성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지하 특성 상 창문이 없고 늘 형광등을 켠다. 자연 채광이 없으니 낮밤도 알기 어렵고 밖의 날씨 또한 잊게 된다. 수영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외국을 여행하며 가본 수영장들은 대개 지상에 있어서 한국 수영장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일본의 지역 도시들은 주로 복합 스포츠센터에 대형 수영장이 있는데, 이런 스포츠센터는 시내 중심부를 기준으로 외곽에 있다(그렇다고 해도 대중교통으로 못 갈 거리는 아니다) 작년 여름에 간 마쓰야마의 복합 스포츠센터엔 수영장 옆에 야구장이 있었다. 수영하다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면 수영장의 통 창 밖으로 야구장의 푸른 잔디가 펼쳐지고 머리를 손톱만큼 짧게 깎은 어린 야구선수들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 나란히 서있는 나무와 새들의 기분 좋은 지저귐도 활짝 열린 수영장의 문을 통해 들려온다. 이런 곳에선 왠지 수영만 하는 게 아까워 숨 고르기를 핑계로 물속에 몸을 담그고 가만히 수영장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호주 시드니의 한 수영장은 천장이 반 개방된 형태였다. 평일 오전이라 수영하러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실내는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쇼팽 음악의 선율이 관객석 곳곳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뒷짐 지고 인자하게 걸어가는 어르신의 걸음처럼 찬찬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그 속도에 맞춰 나도 아주 느리게 배영을 했다.


주변엔 나처럼 특정 운동을 오래도록 즐기는 지인들이 있다. 클라이밍, 크로스핏, 달리기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런 운동도 수영과 마찬가지로 어떤 공간을 찾아가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터라 지인들은 여행 중에 한번클라이밍장, 근처 공원 등을 찾아 운동하고 그곳의 풍경에 자신을 그려 넣는다. 거대하고 화려한 성, 좋은 그림을 많이 보유한 박물관 역시 나 또한 좋아하고 즐기지만, 여행 일정에 책갈피처럼 슬쩍 내 루틴을 끼워 넣어 보라고 말하고 싶다. 늘 비슷한 풍경, 낯익은 사람만을 만나던 곳에서의 운동이 아닌 전혀 다른 장소에서 익숙한 것을 할 때, 전에 없던 낯선 즐거움이 우리를 찾아오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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