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넨 말 남은 말 돌아온 말

모든 공은 어떤 형태로든 궤적을 그리듯

by 중앙동 물방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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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풀이에서 평소 얘길 별로 나눈 적 없는 후배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 친구가 나를 보더니, 본인이 인턴일 때 회사 사람들이랑 같이 저녁을 먹었는데, 밥을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내가 챙겨줬다고 했다. 실은 그 친구가 인턴을 했는지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전혀 몰랐다. 내가 대단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연차가 낮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으니 음식을 집어 먹을 수 없는 친구를 위해 접시를 당겨 주거나 말을 건넨 듯하다.


다른 동료가 내 옆에 앉았을 때, 자신에게 7년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나한테 결혼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던가. 결혼을 꼭 하고 싶은 건 아닌데, 그냥 사람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웬만하면 다 누리고 싶으니까 그런 의미로 할 생각은 있다고 말했다. 스카이다이빙이나 번지점프를 예로 들었다. 평소 감정 표출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내 말을 듣고 처음으로 동요하는 듯한 리액션을 보여서 기억한다. 자기가 결혼에 대해 여러 사람에게 물었는데 이런 대답은 처음이라고 했다.


한 후배는 간헐적으로 내가 예전에 본인한테 보냈던 메시지를 캡처해서 보낸다. 얼마 전엔 자신이 신입일 때 내가 구체적인 연유를 들어 칭찬한 걸 얘기하며 그 이후로 자기 부사수에게 그 방식대로 칭찬했다고 말했다. 이 또한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잘했으니 칭찬했을 거고 그건 별로 특별하지 않으니까.


솔직히 이런 말을 들으면 다소 놀랍고 무섭다. 내가 뱉은 말을 나는 다 기억할 수 없는데 들은 사람은 기억하고 있다. 그게 좋든 좋지 않든.


나에게도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에서 수재민 돕기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안 쓰는 학용품을 기부하라고 했다. 당시엔 삐라를 주워 경찰서에 가져가면 연필을 주곤 했는데 동네 파출소에서 삐라와 맞바꾼, 깎지도 않은 새 연필을 안 쓰는 필통에 채워 가져갔다. 다음날 선생은 학생들이 제출한 학용품을 들춰 보다가 내가 제출한 필통을 보고 얘기했다.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새것을 기부하지 않았음에 대한 핀잔이었다. 필통은 조금 낡았어도 당시 내가 안 쓰는 물건이기도 했고 속 안에 있던 연필들은 나름의 노동력이 동반된 새것이었는데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그 선생의 얼굴도 뭣도 기억나지 않지만, 얼굴이 붉어진 그 순간은 잊히지 않는다. 수치심이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알게 되었으리라.


나는 그 선생의 나이가 되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대도 우린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 선생이 내게 했던 말처럼 내가 던진 어떤 말은 아마 누군가에게 상흔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무수한 말이 다행히 그 사람에게 유의미한 응원의 메시지로 전해졌을 때만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메아리처럼 돌아온다. 내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는 위인도 아니고 꼭 필요한 게 아니면 타인에게 좋은 말을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저 최대한 말을 줄여 실언할 기회도 줄이려 한다. 날아간 공은 궤적을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기록에 남듯, 말도 누군가의 가슴에 박혔거나 그 사람을 어루만져주었거나 둘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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