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크없이 무작정 들어오는 자들에게
그날 처음 “왜요?”라고 되물었다. 본인이 듣게 될 보기에 그런 말은 없었는데 하는 표정이었다. 세 여자 사이를 비집고 자리한 3초간의 무거운 공기도 생생하다. 그들도 처음이겠지만, 나 역시 그건 왜냐는 되물음은 오랜 고민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룬 첫 시도였다.
친근함을 무기로 웃음을 방패로 사생활을 캐내려는 심마니와 자주 마주치곤 했다. 눈이 마주치는 등 말을 건넬 기회가 생기면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채 나이를, 결혼 여부를 묻고 대답이 긍정일 경우 아이 여부와 아이의 나이까지 묻는다. 모든 질문은 면구스러울 정도로 뻔하다. 왜 그리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을까. 어떤 근거로 ‘당신은 반드시 내 질문에 대답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걸까.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자기 삶이 재미없기 때문이다. 뻔하고 낯설 것 없는 일과에 눈을 돌려봤자 즐거움이 없으니 타인의 삶에 침입해 간섭의 재미 좀 보겠다는 심산이다. 더불어 이미 그런 질문에 본인도 숱하게 노출되어 질문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전혀 못 한다. 그저 심심해서 궁금해서라는 이유는 첫 번째 이유와 맞닿아 있다.
당시 정신과 몸이 사그라지는 재와 같은 형상이었고 관계 피로 증후군이 극에 달해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같은 레인에서 수영하며 눈인사만 하는 사람이 그날은 작정했는지 친구를 대동하고 물었다. “혹시 결혼하셨어요?” 나는 대답했다. “그건 왜요?” 그래, 이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을 애써왔는가. 모든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고 원치 않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알면서도 왜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을까.
이상하거나 까다로운 사람으로 비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웠다. 무응답이나 되물음은 상대방에게 곤란함을 전달한다. 그렇게 전달된 곤란함은 사회적 관계에서 약자에 처한 이에게 대체로 긍정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입사 면접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을에게, 되물음은 할 수 있으나 해본 적 없는 투명 보기에 가깝다. 어쩌면 그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되묻기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나에 대한 인사권을 갖지도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내 사생활을 알고자 불쾌한 질문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도를 확실히 전달하는 게 더 중요했고 설령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이들과 깊은 관계를 이어나갈 마음이 없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 그럼 이제 원치 않는 질문에 모두 ‘왜요?”라고 물읍시다! 하고 주장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마 그렇게 하긴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공포를 모르는 게 권력이다. 나는 되물음이 불러올 공포를 안다. 그래도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왜 물어보냐고 되물음으로써 상대방이 예의가 없음을 명확히 인지시켜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