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네이 Oct 06. 2021

이런 사람은 만나도 좋다

6월 1일 OO여고 강의날

반려인은 강연을 많이 하러 다닌다. 대개 기획 강의인데 타깃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고 트렌드와 유머도 적절히 업데이트하는 등 나름 신경을 쓴다. 나는 그저 무대 위에 선다는 상상만으로 에스프레소 여덟 잔을 연거푸 들이켠 것처럼 심장이 뛰는데 반려인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신규 프로젝트를 함께 준비하며 그가 클라이언트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하는 모습을 수차례 보았는데, 앞에 있는 이가 CEO든 누구든 주눅 드는 기색이 조금도 없고 심지어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음료를 엎질러도 당황하지 않으며 끊김 없이 이어나가는 모습이 실로 경이로웠다. 아마 프레젠테이션 도중 스크린에 운석이 떨어져도 잠깐 빗겨 서서 이어나갈 사람이다.


이런 그가 어떤 강연을 앞두고 근심 어린 표정을 하고 있길래 대체 무슨 강의냐고 물었다. 삼사십대 여성들과 그들이 동행한 어린 자녀들이 뛰노는 앞에서도, SNS가 익숙하지 않은 50대 자영업자를 대상으로도 강의해봤지만 이번엔 그 대상이 여고생이라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 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고. 게다가 얼마 전 출간한 책과 관련해 저자의 자격으로 그들을 만나는 것이라 대상도 내용도 고민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말은 저리해도 청산유수처럼 한 두시간쯤은 거뜬히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더하려 하지 말고 대신 무슨 말을 하면 안 되는지를 좀 더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가 아니더라도 지금 학생들 주위엔 그들을 가르치려 하고 말을 덧대려는 작자투성이일 테니까.


무슨 얘길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까지 생각하라고 하니 외려 스트레스만 커졌는지 알겠다고 옅게 웃는 반려인의 얼굴엔 불안과 초조가 주름 사이에 끼어 히물거리는 듯했다.



"오후엔 아주 무시무시했던 여고 강의를 마쳤다. 정말 많은 학생이  책을 샀고 그만큼 사인받으려는 줄이 길었다. 여러 이야기를 건넸지만, 그중 '만나도 좋은 사람의  가지 기준' 가장 반응이 좋았다.

첫째, 자신의 약점을 알고 인정하는 사람. 둘째,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아는 사람. 셋째, 함께 영화나 책을 볼 때 같은 대목에서 웃고 울  있는 사람.  말을  때는 다른 일을 하던 학생들도 모두 고개를 들고 주억거리며 메모했다."

- 2018년 6월 1일 반려인의 일기



'만나도 괜찮은 사람'의 조건은 우리가 저녁을 먹고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하릴없이 각자 하나씩 던지며 만들었다. 몇 개의 조건이 더 붙었다 떼었다 했지만 양쪽의 합의로 이뤄낸 세 가지였다. 그는 강의가 끝나고 한 학생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오늘 빻은 소리가 없어서 좋았어요"




 

이전 01화 결혼 축하한다는 말 대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