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네이 Oct 15. 2021

사랑엔 증명사진이 필요없는데

10월 26일 결혼기념일

서늘한 바람이 이마에 닿으면 결혼한 햇수를 세어본다. 올해로 만 7년이 됐다. 결혼 전엔 서울에 이런 동네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제는 반려인과 내가 이곳의 깊게 패인 궤적을 기억하는 오랜 주민이 되었다. 결혼기념일은 한 독재자가 숨진 날(순화한 표현)과 같아서 날짜를 잘 기억하지 않는 나도 헷갈리지 않는다. 나는 결혼식을 웨딩홀이 아닌 사옥의 정원에서 했는데 야외 결혼식을 할 수 있을 만큼 춥지 않되, 결혼을 결정한 순간부터 가장 멀리 있는 날로 하다 보니 그해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이었다.


연애할 때 화이트데이 같은 것을 챙기지 않았고 사귀기 시작한 날도 모른다. 누가 만든 지 출처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날 대신, 입추나 처서 같은 절기를 챙겨보면 어떠냐고 얘기하곤 결국 잊어버렸다. 어떤 날을 정해 선물을 주면서 축하하고 무언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부여하는 게 우리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어느 하루를 특별히 여기는 대신, 그 하루를 둘러싼 무수한 날의 소중함을 아는 게 더 중요하다.


코로나 이전엔 결혼기념일에 외국 여행을 갔다. 사실 결혼기념일이라서 여행한다기보다 원래 여행을 많이 다니는데 명분을 하나 더 만든 것이다. 출국할 때 공항 면세점에서 싱글몰트 스카치위스키 한 병을 산 뒤, 미리 준비해간 모노폴리를 하면서 여행지에 있는 동안 위스키 한 병을 비운다. 기념일이라 전에 없던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라 원래 좋아하던 것을 그대로 한다. 함께 여행지를 고샅고샅 살피고 그곳의 순간을 담뿍 느끼는 데에 집중한다. 본래 SNS에 무언가를 자주 올리는 편은 아닌데 결혼기념일이나 생일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결혼식 당일 둘 다 SNS에 아무것도 올리지 않아 당시 몇몇 하객들이 올린 사진이 몇 안 되는 기록이다.


언제부턴가 요란한 게 싫었는데 그 요란함의 역치가 더 낮아졌다. 우리가 즐거운 것 외에 무엇이 더 중요할까. SNS에 실시간으로 보고되는 기념일의 순간을 보면 여행하러 간 건지 SNS에 남기러 간 건지 모르겠다. 무엇을 올릴지 고민하느라 좋은 풍경을 주변에 두고도 휴대폰만 바라보며, ‘좋아요’가 얼마나 달리고 누가 내 스토리를 봤는지 확인하는 일로 여념 없다. 타인에게 내 행복을 증명하고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지를 인정받으려고 애쓰면 너무 피곤하지 않은가.



“자신이 사랑꾼임을 과시하는 남자는 로맨티스트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내 모습과 그 모습에 열광하는 대중에게 중독된 나르시시스트일 확률이 높다. 그래서 자신이 여자에게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주는 이들을 경계해왔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증명하기 위해 커플 기념일을 챙기는 커플은 특히 위태로워 보인다. 기념일이라는 것이 뒤집어보면 축하보다는 불안함으로 시작되었다. 돌잔치도 새해 인사도 모두 무한한 시간 앞에 불안함이 만들어낸 어떤 것일 뿐. 사랑을 증명하려는 사람을 보면 사랑보다 불안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 2019년 10월 26일의 반려인의 일기



중학교에 다닐 때, 애인과 사귄 지 22일을 기념하는 친구들이 왕왕 있었다. 100일도 아니고 22일이라니 그 애매한 숫자에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투투’라는 귀여운 네이밍을 붙인 중학생의 로맨스를 응원하며 친구의 손에 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쥐여 주었다. 100일까지 가는 것도 워낙 어려우니 22일을 챙기려고 했던 것이겠지.


이전 02화 이런 사람은 만나도 좋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