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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이 Oct 04. 2021

이 무대에서 관객은 한 명 뿐

12월 2일 처가 새 프로젝트를 맡은 날

자기계발서가 유행하면 덩달아 언급되는 키워드가 있다. 그해엔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라는 단어였다. 나는 MBTI나 혈액형처럼 사람을 어떤 정해진 타입에 욱여넣어 분류하려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여기에 싫은 것 하나를 더 추가하면 "너는 둘 중 어느 쪽이냐"는 질문이다. 좌냐 우냐, 흑이냐 백이냐, 스페셜리스트냐 제너럴리스트냐. 질문 자체가 잘못되어 답을 거부하는 게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는 제너럴리스트에 가깝다고 답했다. 회사에서 매년 내야 하는 숙제 같은 업무성과표에 뭐라도 적어야 했기 때문이다.


40여 명 되는 조직(10년 전 회사 규모)에서 이것 하나만큼은 대표님 뺨 때리게 잘하는 게 무엇일까 자문하니 답이 궁색했다. 스페셜리스트는 아니니까 굳이 따지자면 제너럴리스트 아닐까 지우개찬스를 썼다. 실제로 포스터 부착부터 대학생 서포터즈, SNS 운영까지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가리지 않고 했다. 이제 막 대행업에 활기를 띤 회사에 입사한 저년차 직원이라는 상황도 영향이 있지만, 나 또한 회사의 모든 업무를 다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다닌 지 5년이 되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어, 근데 진짜 남보다 특별히 두각을 보이는 건 뭘까.


반려인은 의심할 것 없이 스페셜리스트다. 그도 입사 초기엔 이런저런 일을 했으나 결국 기획에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 일을 위주로 해왔다. 잘하는 것 같다는 정도가 아니라 회사의 어떤 이를 붙잡고 물어봐도 기획의 왕으로 반려인의 이름이 나오는 수준이다. 누아르 영화 속 적군을 살해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최종 병기로 자라온 주인공처럼 그는 오로지 기획자의 길을 걸어왔다. 많은 이가 자신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에 대해 수차례 많이 고민하며 살 텐데 저이는 자신이 잘하는 것을 알고 심지어 조직에서 인정까지 받는다. 그의 재능이 부럽긴 해도 그 경지에 다다르기까지 KTX 타고 간 게 아님을 알고 있다.


"나는 인간이 언제 꼰대가 되는가에 관심이 많다. 원인을 선뜻 알 수 없던 내게 올 초, 처가 무심코 내뱉은 이야기는 내게 큰 단서가 됐다. 당시 처는 대형 디지털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난생처음 html이란 것을 배워야 했다. 나 같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까다롭고 막막해 외주를 줬을 텐데 처는 이런 일에 어떤 두려움도 없다. 처는 늘 그랬다. 여기서 마을버스를 타면 된다,는 정도의 표정을 짓곤 '배워서 하면 돼'라고 말한다. 나로선 평생 가져보지 못한 삶의 태도다. (중략)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호기심이 깃들기보다 웬만한 일엔 기시감을 느끼거나 시큰둥해진다. 다름 아닌 내가 그렇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은 늙는다. 매사에 호기심이 있고 찬탄할 줄 아는 한 사람은 늙거나 꼰대가 되지 않는다. 삶을 추동하는 힘이야 제 나름으로 다르겠지만 처의 경우엔 호기심임이 틀림없다. 그 마음이 11년이란 분투의 시간을 잇대었을 거다."

- 2020년 12월 2일 반려인의 일기


회사 사람들은 반려인의 통찰력 있는 인사이트가 담긴 제안서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어디에서 얻는지 궁금해한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레시피처럼 인사이트를 얻는 노하우가 당연히 있으리라 간주한다. 나도 궁금했고 나중엔 그가 기획에 특화된 사람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10여 년 동안 회사 안팎에서 그를 지켜 본 결과는 이렇다. 정말 제대로 읽은 건가 싶을 정도로 그는 책을 빠르게 많이 읽는다. 휘발하는 기억의 꼬리를 잽싸게 붙잡듯 잠깐 떠오른 생각도 놓치지 않고 메모하며 그런 노트가 수십 권이다. 매일 신문을 읽고 스크랩하고 유사한 성향을 가진 책을 찾아 기사를 끼워 넣는다. 끊임없이 읽고 찾고 기록한다. 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프로 선수처럼 15년 간 이 같은 일을 숨 쉬듯 한다. 


반려인의 인사이트는 타인에게 잘 보이지 않는 그의 백스테이지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언제 무대에 설지도 모르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을지 그 여부조차 모르지만 묵묵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백스테이지를 지키는 것. 우리는 각자 백스테이지의 유일한 관객으로 남을 것이다. 좋은 관계를 오래 지속하는 비법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준비된 화려하고 멋진 모습이나 결과 보다 서로의 미진하고 부단히 움직이는 백스테이지 속 움직임을 지그시 바라보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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