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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이 Oct 20. 2021

함께 웃고 있나요

10월 18일 백신 맞은 날

어제 반려인은 2차 백신을 맞았다. 공가를 쓸 수 있지만 일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책임을 다하려는 인간에게 백신은 잠시나마 관용을 베풀었던 것뿐 저녁부터 열이 급속도로 오르더니 밤새도록 고열과 구토에 잠을 쉬이 이루지 못했다. 결국 다음 날 아침부터 그는 약을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백도와 콜라를 먹고 싶다는 반려인의 말에 동네를 뒤져 백도를 구해왔다. 이 엄동설한에 어디서 백도를 구하냐는 말도 잊지 않았다. 백도가 담긴 그릇을 건네며

“당신 어제 주사 맞으면서 그거 안 해서 그래”

 “뭐?”

“백신 맞기 전에 무던무던 모더나! 말했어?” 

“아 뭐야. 그럼 당신도 아자아자 화이자 하면서 맞아”

“응 난 그러려고 이미 연습도 했어.” 

아픈 사람과 곧 아플 사람은 열없이 웃었다. 나는 오늘 재택근무를 하다 2차 백신을 맞았다.


반려인의 고열이 심해져 집에 있는 이부프로펜을 하나 더 먹으라고 권했다. 그 약은 타이레놀과 이름이 매우 유사했다. 알약을 먹으며 이부프로펜에 관한 상황극이 시작됐다.

 

“팀장님, 이번에 출시한 이부프로펜 이름을 뭐로 하면 좋을까요?” 

“음.. 우리 경쟁사 이부프로펜 중에 잘 나가는 거 뭐 있지?” 

“아마도 타이레놀..?” 

“그래? 그럼 타레이놀 어때? 어디서 보니까 앞과 마지막 글자만 같으면 다 뜻이 통한다고 하더라고? 사람들이 타이레놀 사러 왔다가 착각해서 많이 사 가지 않겠어?” 

“그래도 그건 좀.. 너무 따라 한 것 같지 않나요? 타레이놀.. 타레놀.. 타.. 타세놀..! 타세놀 어때요?” 

“오! 그게 좋겠네. 따라한 것 같지 않으면서 앞뒤는 같고 세글자니까 타이레놀도 별말 못할 거야”

 

우리는 제약회사 마케팅팀의 회의 상황을 재연하며 다시 키득거렸다. 그의 체온은 37.6도. 고열이 나도 유머에 진심인 걸 보면 수용소에 기약 없이 갇힌다 해도 주변 사람에게 시시한 유머를 던지고 매일 면도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을 사람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유머에 욕심이 많다. 유머가 기발하면 내심 놀라거나 정말 웃겨도 꾹 참으며 자신이 더 웃기려고 다음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문득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이 떠올랐다. 뾰족한 느낌의 무서운 선생이었는데 가끔 웃기는 말을 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말을 하면 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 웃고 나면 뭔가 편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학생의 특징을 유머로 삼았던 것 같다. 당시 어리기도 했고 내가 그 유머의 대상이 아니어서 그리고 남들이 웃으면 그저 웃긴가 보다 했는데 분명 그 선생의 말에 웃지 못하는 이가 있었을 것이다.


“싫다고 생각하는 건 자유지만 싫은 걸 표현하면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에, 가급적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 법도 한데… 불쾌함을 표현하거나 문제를 지적하면 그저 PC 충이라고 비꼰다.

차별이나 혐오를 하지 않는 방법은 무척 간단하다. 웃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웃지 못할 사람이 있는가. 아무리 개그라도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하는 게 맞다.”

- 2021년 10월 18일 반려인의 일기



온라인상에서 화제 되는 영상을 볼 때 웃기 전 생각한다. 약자를 희화화하거나 대상화하고 있지 않은지. 아무리 많은 이가 재밌어해도 오답이 정답 되는 게 아니듯 유머도 마찬가지다. 고등학생들의 졸업사진 속 흑인 분장, 한 남자 개그맨의 인스타 컨셉(인스타에서 제품을 판매하는 여성의 모습을 희화화)이 전혀 재밌지 않았다. 웃기지 않는다고 상대에게 얘기했을 때 별것이 다 불편하냐며 당신을 이상하다고 여긴다면, 그리고 그런 횟수가 점차 많아진다면 생각해 봐야 한다. 유머는 한 사람의 인격을 반영한다. 같은 대목에서 웃을 수 있고 서로의 웃음 포인트가 다를 때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인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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