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남겨둔 것들

봄을 위해서

by 우주율




지난 몇 해, 몇 개월 동안 써둔 글들을 뒤적여보니 ‘마른풀‘에 대한 감상이 여러 번 보인다.

노란빛을 반사하는 여린 몸들, 서걱거리는 소리와 질감,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이 만드는 서사에 매료된다.

특히 무성히 덤불이 되어 큰 덩어리를 만들어 놓은 모습을 발견하면 드디어 형체를 드러냈구나 싶다. 장난기 많은 친구를 기다린 듯이 반가운 마음마저 든다. 겨울 동안 숲의 곳곳에 생긴 마른 수풀 덩어리들은 어쩌면 수상해 보이기도 하다가 이내 웃게 된다. 그 정체의 무해함을 발견했다랄까.


마른풀은 다정하고 포근하다. 도톰한 두께의 그 밑에서 여린 잎이 안전하다. 아마도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겠지. 굳은 땅이 녹아 흐르고 물길이 돌고, 죽은 듯했던 마른 뿌리에 물이 찰 거야. 어디에서 그 많은 잎이 생겨났을까, 흙 속의 수만 개의 알과 씨앗과 유충들이 꿈틀거리겠지, 내가 모르는 아무도 모르는 수많은 일들을 위해서 덤불이 이불이 되어서 덮고 있다. 봄을 위해서.



진행중 2026 봄





고운 천으로 만든 바탕을 캔버스 틀에 묶어두고 수채용 바인더 Binder를 여러 번 바른다. 수채용 제소 Gesso를 칠해서 마감하면 이제 수채물감을 다 흡수해버리지 않고 표면 위에 안료를 안착할 수 있게 된다.

수채물감과 과슈를 사용해서 그리고 있는 이 작업은 한두 달 정도 지켜보며 천천히 진행하고 있다. 지금은 제법 거친 질감이 있는데 여러 번 수채를 덧칠하며 보드라운 표면의 감촉을 만들고 싶다. 두렵지 않아 보이도록,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 보였으면 좋겠다.


수채를 덧칠하면 내가 그려낼 수 없는 우연과 얼룩이 생겨난다. 물과 시간과 안료가 만들어내는 것들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취사 선택하는 것과 약간은 의도하는 것이다. 물길을 만드는 농부처럼 붓으로 길을 만들면 나머지는 수채 안료가 얼룩을 만든다. 처음의 얼룩과 몇 시간의 건조 후의 얼룩이 또 달라진다. 그렇게 지켜보며 시간을 들여간다. 그림이 보드라워지도록

그림 위에도 봄이 오도록.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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