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금

8화

by 노이망



명함을 엑셀에 입력하는 일은 단조로웠다. 몇 번씩 하품을 했고, 할 때마다 거울을 보며 아이라인이 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냈다. 입력이 끝난 명함 뭉치를 옆으로 치워두고 기지개를 켜는 동안 땅딸막한 김 과장이 씩씩하게 들어왔다.


“다녀오셨어요.”


“응. 아이고. 날씨가 너무 좋아.”


김 과장은 영수증 한 장을 내게 주며 말했다.


“회장님 차 타이어 갈았어.”


아직 처리하지 않은 영수증 뭉치 뒤쪽에 끼워 넣고 서랍에 집어넣었다.


“아참, 유진 씨. 위층 회사 전화번호 좀 찾아줘 봐.”


“위층 어느 회사요?”


“E 공사 말이야. 영 기분이 나빠서 주의를 주든지 해야겠어.”


“무슨 일 있으셨어요?”


“퉁퉁해가지고 맨발로 슬리퍼 신고 다니는 남자 알지?”


“모르죠.”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야. 발톱을 길게 해 가지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게 영 보기가 안 좋잖아. 발톱을 깎든지, 양말을 신든지, 어떻게든 조치를 취하라고 한 소리 좀 해야겠어.”


어우. 물론 타인의 기다랗고 때가 낀 혐오스러운 발톱을 보는 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가 다니는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주의를 줄 만큼 요란을 떨 일인 걸까. 하여튼 김 과장의 지나친 오지랖은 알아줘야 한다. 인터넷으로 위층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검색해 김 과장에게 적어주었다. 김 과장은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발톱을 깎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한참 동안 설명을 했다.


“유진 씨. 내가 그때 말했던 실손보험은 들었어?”


통화를 끝낸 김 과장이 내게 물었다.


“아뇨.”


“엄한 데 알아보지 말고, 우리 아내한테 들어. 혜택이 제일 좋아. 우리 아내가 잘해준대.”


김 과장은 가족들 보험비로만 매년 수천만 원을 쓰는 사람이었고 틈만 나면 내게 본인의 아내가 하는 보험에 가입하길 권유했는데, 박 과장은 이미 몇 개의 상품에 가입된 듯했다. 또한, 김 과장의 아내는 다단계 생리대의 회원이기도 해서 얼마 전에는 박 과장의 아내도 자기 밑으로 가입시켰다고 했다. 무시무시한 부부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할 게 뭐 있어. 그냥 바로 되는 건데. 비싸서 그래?”


“실손 15만 원은 좀 오버 같아서.”


“그럼 유진 씨. 다른 사람한테 이렇게 해준 적 한 번도 없는데, 특별히 첫 달은 우리가 내줄게.”


“아뇨. 김 과장님. 제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실손은 빨리 드는 게 좋아. 어차피 할 거면 나한테 꼭 얘기하라고. 알겠지? 첫 달 내줄게. 응?”


자기 할 말을 끝낸 김 과장은 탕비실에 들어가서 물을 가득 채운 큰 물뿌리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사무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화분에 물을 주었다. 화분을 제 몸처럼 관리하라고 직원들에게 잔소리하는 김 과장의 목소리가 멀찍이서 들렸다. 공기가 어쩌고, 산소가 어쩌고.


간간이 비행기 예약을 하고, 대표 전화를 받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니 어느새 여섯 시가 되었다. 회장의 사이버 바둑 대결이 늦게 끝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다행히도 그는 다섯 시쯤 일찍 퇴근했다. 김 과장은 주차장에 대기하러 가는 길에도 내게 말했다.


“잘 생각해 봐. 첫 달 내준다고. 고민할 거 없잖아.”


뒷정리를 하기 위해 비어있는 회장실에 들어갔다. 열려있는 창문들을 닫고, 옷장을 정리하고, 책상을 치우고, 컴퓨터와 불을 끈 뒤 방문을 닫았다. 비어있는 사장실은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오늘 아침에 정리해 두었으니까. 비서실로 돌아와 노트북을 끄고 가방을 챙겼다. 비서실 옆에 있는 출퇴근 기에 살금살금 걸어가 퇴근 버튼을 누른 후 검지를 갖다 댔다.

야호. 1등 퇴근이다.




금요일답게 백화점 푸드코트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내가 자리를 지키는 동안 남자친구가 주문했던 음식을 가져왔다. 남자친구는 돈가스 정식, 나는 볶음면을 시켰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어제오늘 있었던 일

을 남자친구에게 낱낱이 얘기했다. 내 말을 듣는 동안 그는 웃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배가 더부룩해서 밥을 반쯤 남겼다. 일어나려는 찰나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마 비행기를 못 탄다는 전화겠지.


“네. 사장님.”


“비행기 취소하고 아홉 시 반 기차로 예매해. 좌석번호 문자로 보내고.”


“네. 알겠습니다.”


그럴 줄 알고 몇 개를 예약해 두었지. 아이고. 아홉 시 반은 안 해두었구나. 10시 이후로 예약되어 있는 네 개의 기차표를 모두 취소하고 아홉 시 반 기차표를 새로 예매했다. 기차 시간과 좌석번호를 사장과 박 과장에게 문자로 보낸 후 비행기 표도 취소했다. 취소 수수료가 만만치 않은 걸 알면서도 여러 개의 기차표를 확보해 둘 수밖에 없는 건 역시 사장 때문이다. 비행기를 예약해 두고선 갑자기 기차를 타겠다고 연락 오는 게 비일비재한 데다가 원하는 시간의 좌석을 확보하지 않으면 난 죽으니까.



영화 시작 30분 전에 영화관 로비에 도착했다. 남자친구와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영화가 시작될 때까지 여기서 시간을 보낼 요량이었다. 휴대폰으로 오늘 볼 영화의 예고편을 틀었다. 중간쯤 봤을 때 전화가 왔다. 조 전무였다.


“네. 전무님.”


“유진 씨... 퇴근했지?”


시간이 9시가 넘었는데, 당연한 걸 뭘 물어보냐.


“네.”


“골드 CC 카드... 내일... 내가 가는데.”


말 좀 빨리하지. 답답한 심정으로 조 전무에게 들리지 않을 욕을 중얼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골드 CC……. 카드 필요한 거…….”


“제가 챙겨드렸잖아요.”


나는 조 전무의 말을 가로챘다.


“그렇지... 근데 깜빡하고... 자리에 놔두고 왔는데... 내가 지금 집에 왔는데... 그냥 가도 되겠지?”


복장이 터질 노릇이다. 뭔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조 전무님. 골드 CC는 카드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자주 가셔서 아시잖아요.”


“내가 회장님이랑... 블루 CC 갔을 때는... 그냥 들어갔었는데...”


“블루 CC는 카드 없어도 입장이 가능하니까 그냥 들어가신 거고, 골드 CC는 회원권 카드가 있어야 해요. 그래서 제가 카드 챙겨드린 거잖아요. 매번 말씀도 드렸고.”


“이상하네...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어쩌지, 그럼?”


내가 숨이 넘어가기 일보직전의 모습이 되자 남자친구가 말없이 내 등을 도닥였다.


“저도 지금 도와드리기가 어려워요. 꼭 카드 챙겨 가셔야 해요.”


“어쩌지... 거리가 먼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일단 알겠고... 근데 혹시... 유진 씨가 들고 있는 다른 카드는... 없나?”


“없어요. 제가 드린 그 카드번호로 예약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걸 챙겨 꼭 가셔야 해요. 제가 다른 카드 드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그래... 우리 직원한테 시키든지... 해야겠네.”


“네. 그렇게 하세요.”


“그래...”


전화를 끊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저렇게 덜떨어진 인간이 전무까진 어떻게 올라간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개도 교육을 하면 룰을 이해하고 따르는데, 이 임원이란 것들은 같은 내용을 얼마나 반복해서 말해야 학습이 되는 걸까. 답답해서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고구마를 열 개 정도는 먹은 기분이었다.

그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신용카드 앱을 열어 다음 달 결제예정금액을 확인했다. 절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필요했다. 결제예정금액은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껴 써야겠다.



신나게 영화를 보던 중 가방에서 진동이 울렸다. 한 번 울리고 마는 진동이 아닌 걸 느끼며 사장 전화라는 걸 직감했다. 가방을 열어 엎어져 있는 폰을 뒤집어보니, 역시 사장이다. 짜증 나게.

폰을 꺼내어 들고 영화관 뒷문으로 살금살금 나갔다.


“네. 사장님.”


“야인마, 너 예매 제대로 한 거 맞아?”


사장의 크고 날 선 목소리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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