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네가 보내준 좌석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잖아.”
“확인해 보고 바로 전화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급하게 열차 앱을 열어 예매한 티켓을 확인했다. 그리고 사장에게 보낸 문자를 다시 열어 보았다. 티켓에 나와 있는 좌석과 사장에게 문자로 보낸 좌석은 같았다. 사장에게 티켓을 보내기 위해 화면 캡처를 하는 순간 티켓의 날짜와 요일이 눈에 들어왔다.
엿 됐다. 티켓은 내일 날짜로 예매되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죽었다. 진짜 나는 죽었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예매한 걸까. 제대로 확인을 해야 했는데. 울고 싶었다. 다시 일어나서 괴로운 마음으로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은 통화연결음이 시작되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됐어.”
“사장님. 제가 예매를 잘못했습니다.”
“뭐? 야. 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기차 안이 아니었다면 사장은 아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는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야. 너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내가 너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해야겠어? 이게 진짜. 끊어, 인마!”
내가 죄송하다는 말을 더 반복하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자괴감에 몸부림을 쳤다. 한심하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고작 이따위의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욕했나. 뭐든지 잘해도 본전일 판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해버렸다. 나 자신
이 너무나도 싫었다. 월요일에 사장의 얼굴을 볼 바에야 그냥 모든 걸 다 팽개치고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다시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기차 안에서 티켓 새로 끊었다.”
사장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서늘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허공에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유진 씨. 유진 씨는 날 도와주는 사람이야. 맞아, 아니야.”
“맞습니다. 사장님.”
“유진 씨는 내가 회사를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편하게 해줘야 하는 사람인데 날 더 불편하게 만들면 도대체 어떡하자는 거야. 어?”
“시정하겠습니다.”
"일하기 싫어?”
“아니요.”
“너 그냥 다른 여자들처럼 시집가면 그만둘 생각으로 일하는 거야?”
“아니요.”
“이 사람아. 그러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하란 말이야. 나도 시집가면 그만둘 생각으로 대충 일하는 직원이랑은 같이 일하기 싫어. 그게 아니라면 잘 좀 하란 말이야. 알겠어?”
“네.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실수 없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겠습니다.”
“알았어. 끊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나 왜 이러니. 아무래도 영화는 다음에 한 번 더 봐야 할 듯하다.
다음 날, 끊이지 않는 진동 때문에 잠에서 깼다. 한쪽 눈만 겨우 떠서 벽시계를 보니 8시였다. 폰을 들어 화면을 켰다. 김 과장의 부재중 전화 8통, 문자 1통.
[8시 20분까지 회사 올 것. 택시비 주겠음.]
짜증 난다, 정말.
침대 끝에 걸터앉아 김 과장에게 전화했다.
“아이고. 유진 씨. 전화를 안 받아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무슨 일이신데요.”
“다름 아니고, 회장님 주례사 수정을 좀 해야 해서.”
“어제 다했잖아요.”
“단어 몇 개를 좀 수정하시고 싶으시대. 지금 회사로 올 수 있어? 택시비 줄 테니까 택시 타고 와.”
“저 오늘 친구 결혼식 있어서 못 가요.”
거짓말.
“결혼식이 몇 시야? 어디서 하는데? 잠깐 왔다 가면 안 돼?”
“멀어요. 지방이에요.”
“아이고. 이를 어쩌나. 아까 유진 씨가 전화 안 받아서 마 대리한테도 전화했었어. 마 대리도 안된다는데 부를만한 여직원 누구 없나?”
“없을걸요. 그냥 김 과장님이 하시면 안 돼요?”
“난 컴퓨터 잘 못 하잖아. 일단 알았어. 끊어봐. 다른 여직원한테 전화해 봐야겠네.”
다른 직원에게 전화해 본다는 김 과장의 말에 양심이 찔렸다. 그러나 거짓말을 번복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직원이면 직원이지 굳이 여직원에게 전화해 보겠다는 심보는 또 뭐람. 평소에는 컴퓨터 잘만 쓰면서 이럴 때만 컴맹인 척하는 김 과장이 얄미웠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는 중에 김 과장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다른 여직원에게 피해를 주느니 그냥 내가 가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해결했어. 경영지원본부장이 온다네.”
더 찝찝한 상황이 되었다. 될 대로 되라지.
“잘됐네요.”
“회장님이 비상연락망 새로 정리해 놓으라고 하셔. 유진 씨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연락처 나한테 문자로 보내줘. 급할 때 연락이 안 되니까 아주 답답해, 그냥.”
치가 떨렸다. 수년간 반복되는 업무 외 시간 전화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것도 이렇게 아무런 생산성도 없는 잡일 따위로 말이다. 아무리 내가 비서지만, 비서라는 이유로 나는 사생활도 없는 것인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는 이 보직에 군말 없이 앉았다. 비서로서 겪는 부당한 복리후생도 군말 없이 견뎠다. 회장과 사장의 일정에 따라 늘 혼자 보내야만 했던 여름휴가에도 군말하지 않았고, 그런 여름휴가 때마저도 전화통에 불이 나곤 하는 것도 감내했다. 그뿐만 아니라 연차는 쓴 적도 없다. 아니 못 썼다. 내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아니, 회장과 사장이 원치 않으니까. 혼자서 아래층까지 서른 잔의 커피심부름을 하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져 꼬리뼈를 다쳤을 때에도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CT상으로는 문제가 없었기에 병가를 낼 수도 없어서 일주일 동안은 거의 기어서 회사에 다녔고 한 달간은 절뚝이며 다녔다. 육 개월 동안은 똑바로 누워서 자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미끄러진 나를 탓하기만 했다. 일에 지장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하기만 했다. 마음이 아파도, 몸이 아파도 속으로 욕은 했을지언정 회사 비상연락망으로서의 책임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 아무리 잘해도 본전인 걸 알면서도 말이다. 계약직 비서로 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 차이가 단지 정규직과 계약직 때문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나는 다시 계약직이 되고 싶은 심정이다.
고귀하신 회장께서 단어 몇 개 수정하고 싶으시다는데 버선발로 뛰쳐나가지 않았다는 게 나의 큰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그런데 고작 주례사 단어 몇 개 수정하는 사적인 일로 주말에 직원을 오라 가라 하는 회장의 입장이 당연하다고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 천상의 대접을 받고 싶으면 나도 천상의 비서로 대우를 해달란 말이다. 고작 택시비 준다고 하는 생색 따위는 좀 집어치우고.
나는 김 과장에게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내 비상연락망은 내 휴대폰 번호 하나만으로 족하다.
주말은 금방 지나갔다. 임원의 시시껄렁한 전화 몇 통과 김 과장이 보낸 10통의 문자도 받았다.
[다음 달 둘째 주, 그린 CC, 2부 첫 팀 부킹.]
[제주도 일정변경.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음.]
[회장님, 나, 말일 제주도 첫 비행기로.]
[보류.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음.]
[골드 CC, 2주 뒤 화요일 11시 1팀.]
[최 사장한테도 말했음. 한 번 더 확인.]
[제주도 행사 최종 결정. 말일 마지막 비행기로.]
[다음 주 금요일 블루 CC 11시경 2팀.]
[다음 주 토요일 오전 8시경 1팀.]
[아니 두 팀. 잘못 보냄.]
김 과장은 내 휴대폰을 24시간 사용 가능한 메모장쯤으로 여겼다. 그는 늘 자기가 까먹기 때문에 나에게 미리 보내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위에 나열된 문자들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문제는 그의 문자가 늘 정리되지 않은 내용으로 폭탄처럼 온다는 것이다. 1의 내용으로 문자가 오면 곧바로 1-1 내용의 문자가 왔고, 그 이후로 1-2, 1-3, 1-4 내용의 문자가 연이어 오곤 했다.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 그의 정리되지 않은 업무지시 때문에 나는 한 번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을 두 번, 세 번, 어떨 때는 십수 번을 반복해서 해야 했다. 마치 내가 회장의 주례사를 마흔 번 가까이 수정한 것처럼. 그러고 나서도 주말에 또 수정할 뻔했던 것처럼.
[회장님 올라가심.]
출근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김 과장의 문자가 왔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 대리는 탕비실에 물을 뜨러 왔다가 서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도망을 쳤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회장과 김 과장이 함께 들어왔다.
“주말 잘 보내셨습니까.”
회장은 눈만 끔뻑이며 회장실로 들어갔다. 그를 뒤따라 갔다. 회장의 재킷을 받아서 옷장에 걸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모른다. 내가 회장의 냄새나는 재킷을 옷장에 걸어놓는 동안 그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마디 하려는 걸까? 애써 그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회장실을 나갔다. 탕비실에서 커피와 홍삼차를 준비해 회장실에 다시 들어갔다. 찻잔을 내려놓을 때 그는 입이 간지러운 듯 오물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다음에는 꼭 수정해 드리도록 할게요. 그럴 일이 있다면.
나중에 도착할 사장을 생각하며 긴장된 마음으로 비서실에 돌아왔다. 어차피 욕 뒤지게 얻어먹는 건 길어봐야 오전 중에 끝나는 거라고 생각하니 오늘 하루에 대한 작은 희망이 생겼다. 김 과장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가족들의 휴대폰 번호를 가르쳐달라고 재촉했다. 앞으로 전화를 잘 받겠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김 과장은 끈질겼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장이 올라온다는 박 과장의 전화가 왔다. 평소보다 빠른 도착 시각에 서글픈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바른 자세로 섰다. 어쩌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는데. 김 과장은 탕비실에 들어갔다. 힘차고 강력한 발걸음으로 들어온 사장은 사장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너 따라와.”
나는 사장의 책상 앞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섰다. 그는 자신의 재킷을 옷장에 손수 걸며 말했다.
“유진 씨. 자네가 비서 자리에 원해서 앉은 게 아니란 걸 알아.”
사장이 그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줄 알았다. 보직 이동 당시 경영지원본부장이 사장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자는 말을 내게 하기도 했었으니까. 사장은 의자에 털썩 앉아 등받이를 뒤로 쭉 젖혔다.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원하지 않는 일이라고 해도 그 일 하나 똑바로 못 하는 놈이 다른 일은 똑바로 하겠냐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거야.”
“...”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일을 이따위로 하는진 몰라도.”
“네?”
“형편이 좋지 못했어도 가르칠 건 제대로 가르쳤어야 했는데, 유진 씨 부모님이 유진 씨를 참 많이 아꼈나 봐.”
잠깐만. 뭐지? 지금 부모님 건드린 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들 하지. 그런데, 알아? 실패는 그냥 실패야. 실패하거나 실수하는 사람은 그냥 실패자라고. 알아들어? 실패자가 무슨 보직 이동을 바라는 거야. 웃기지도 않아. 네가 맡은 일이나 똑바로 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 말 알아들어?”
연이은 일방적 타격에 나는 벙어리가 되었다.
“알겠냐고 묻잖아, 지금.”
“네.”
곧장 뒤돌아서서 나왔다. 원래라면 커피를 갖다 줘야 했지만, 자리에 멍하니 앉아서 사장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실패자라고? 부모가 어쩌고 어째? 김 과장이 옆에서 뭐라고 지껄이든, 대표 전화가 울리든, 박 과장이 올라오든, 정 대리가 인사를 하든, 어떤 누가 업무 요청을 하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에는 나를 깔보는 사장의 모습만 보였고, 귀에는 부모를 들먹이며 비아냥거리는 사장의 목소리만 들렸다.
“유진 씨. 그럼 유진 씨 엄마 휴대폰 번호만이라도 알려줘.”
김 과장이 말했다.
“안된다고 도대체 몇 번을 말해요? 전화해서 안 받으면 그냥 제가 죽었다 생각을 하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