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

11화

by 노이망



잠을 별로 자지 못했다. 퉁퉁 부은 눈으로 회사에 출근했다. 아침 일과를 끝낸 후 전자결재로 사직서를 올렸다. 일찍 출근한 회장에게 차를 갖다 주고 돌아오니 경영지원본부장이 비서실 앞에서 온화한 미소로 서 있었다. 그는 내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잠깐 회의실에서 이야기 좀 하지?”


벽면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사장이 오려면 아직은 멀었다. 탕비실에 쟁반을 두고 본부장을 따라 회의실에 들어갔다.


“사직서를 올렸던데?”


“네.”


“더 좋은 데 가는 거야?”


“아뇨.”


“공부라도 하려고?”


“아뇨.”


“그럼 왜? 무슨 일 있어?”


“사장님이 사표 쓰라고 하셨어요. 권고사직처리 해주세요.”


“아니, 잠깐만. 자세히 얘길 해봐. 왜 사장님이 사표를 쓰라고 하셨는지?”


본부장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사장님이 화가 나서 그렇게 말한 거지. 진짜 사표를 쓰란 말은 아니었지 않을까?”


“의도는 궁금하지도 않고요. 저는 사장님 지시대로 사표 썼습니다. 가정교육 운운하시는 사장님 더 모시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이고. 사장님이 왜 그렇게 말씀을 하셨지.”


본부장은 볼펜 끝을 탁자에 톡톡 두드렸다.


“유진 씨 같은 비서 구하기 힘들 텐데.”


본부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진 씨 마음이 변할 여지가 있을까?”


“없죠.”


“그래. 이미 많이 생각해 보고 말한 거겠지. 유진 씨, 밝고 일 잘해서 참 좋았는데. 아쉽네.”


“어차피 본부장님도 곧 다른 회사 가시잖아요.”


그의 눈이 뚱그레졌다.


“어떻게 알았어?”


나는 콧방귀만 뀌었다.


“그래. 그럼 언제까지 일할 수 있겠어?”


“인수인계 기간 한 달 생각해서 11월 말까지만 할게요.”


“음. 그럼 유진 씨. 이렇게 하자. 12월 말일까지.”


“두 달을 어떻게 더 다닙니까? 지금 당장 집에 가고 싶은데요.”


“알아. 무슨 말인지. 내가 12월 말일까지라고 말한 건, 사규에 12월 말일까지 일한 사람에게 상여금이 지급된다고 나와 있거든. 아깝잖아. 한 달 차이로 못 받으면. 내가 12월 말일까지 여기 있는 것도 그런 이유가 없진 않고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 둘 다 그때까지는 다니자. 급하게 그만둬야 할 이유가 없으면 유진 씨도 그렇게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동안 다른 회사도 천천히 알아보면 되는 거고. 올해도 연차 못 썼을 거 아니야?”


“네.”


“어차피 그건 돈으로도 안 나오니까 12월 말에 못 쓴 연차도 몰아서 쓰도록 하라고. 그때 면접을 보러 다니든지 해. 내가 그건 책임지고 무조건 쓸 수 있도록 할게.”


나는 그가 나에게 방관자로서 저질렀던 과오를 이렇게 털어버리려고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내겐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잘 생각했어. 사장님 출근하시면 나한테 말해줘. 내가 말씀드릴게.”




사장이 도착했다는 박 과장의 연락을 받자마자 화장실로 피신했다. 그의 얼굴을 보기도 싫었다. 화장실에서 휴대폰을 보며 5분가량 시간을 때우다 경영지원 본부장에게 갔다.


“사장님 출근하셨습니다.”


본부장은 프린트한 나의 사직서와 회사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사장실에 들어갔다. 나는 비서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본부장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김 과장과 박 과장이 함께 사무실에 들어왔다. 나는 그들에게 고개로만 인사를 했다. 박 과장은 빈 생수병을 들고 탕비실에 들어갔고 김 과장은 내 옆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김 과장은 영수증 십여 장을 지갑에서 꺼내 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지긋지긋한 영수증.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본부장이 나왔다.


“일단 내가 말씀은 드렸고. 찾으시니까 들어가 봐. 나오면 내 자리로 전화하고.”


사장실에 들어가 그의 책상 앞에 섰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아. 사표 쓰란다고 진짜 써? 인마. 사장이 한 소리 한 거 가지고 기분 나쁘다고 쪼로로 사표 쓰냐? 시정하겠다고 하면 되는 거지, 사표는 또 뭔 사표야. 반려시킬 테니까 그렇게 알아.”


“사장님께서 사표 쓰라고 한 게 진심이든 아니든 전 이미 사장님께 해고당했다고 생각합니다. 12월까지만 일하겠습니다. 직원 구해주세요.”


“내가 사표 쓰라고 한 건 네 잘못을 돌아보라는 뜻으로 말한 거야. 진짜 쓰라고 한 게 아니라.”


어떻게든 권고사직 처리는 해주기 싫은가 보지. 그래. 해주기 싫으면 말아라.


“네. 알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만두겠습니다.”


“너 그만두면 뭐 할 건데?”


“다른 회사에 취직해야죠.”


“비서로?”


“아뇨.”


“그럼?”


짜증이 났다. 이제 와서 뭘 이런 걸 꼬치꼬치 캐묻는지.


“회계 자격증이 있어서 그쪽으로 지원해 볼까 합니다.”


확실한 계획은 없었지만 없어 보이긴 싫어 얼레벌레 둘러대었다.


“회계? 회계 일 하고 싶어? 우리 회사에 회계팀 있잖아. 보직 이동하면 되는 것을.”


본인이 어제 내게 했던 말은 아예 생각이 나질 않는 모양이다. 나 같은 실패자가 어디 감히 보직 이동을!


“아뇨. 그만두겠습니다.”


“너 이번에 진급 대상자인 거 알아, 몰라.”


움찔.

아, 그랬어?

아, 그랬구나.

아, 그렇다면?

아쉬운데.

아.


“모르고요. 그만두겠습니다.”


어느 회유도 내게 먹히지 않자 사장의 표정이 바뀌었다.


“유진 씨는 세상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순진해. 네 비서 경력으로 이직이 쉬울 것 같아? 응? 그것도 새로운 일을? 뭐? 회계?”


사장은 비웃음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유진 씨가 몇 살이지? 스물아홉? 서른? 운 좋으면 어디든 취직이야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지금 받는 연봉은 두 번 다시 못 받을 거야. 그건 내가 장담하지. 그냥 내가 배려해 줄 때 여기 있는 게 유진 씨한테도 좋을 거야. 사실 나는 유진 씨가 그만두든 말든 상관없어. 유진 씨 앞날을 위해 내가 마음 써서 말하는 거라고. 너 이제 결혼해야 되지 않아? 돈도 모아야지.”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는 차디찬 현실을 권위 있는 사장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비통했다.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웃기는구먼.”


사장의 뒤에 있는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화려한 도심의 풍경을 감상했다. 참 멋진 동네다. 실제로 내가 하는 일이야 어떻든, 이런 곳에 출퇴근하는 것은 나의 둘도 없는 자부심이었다. 이 회사의 이름이 나를 대변해 주고, 이 회사가 속한 도시가 나를 나타내준다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가 변변치 않으니 마치 내가 다니는 곳들이 나 인양 그렇게 살았다. 이것마저 내 인생에서 없어지고 나면 나는 이제 뭐가 되는 것일까. 나는 누구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 걸까. 정말 모르겠다. 가장 비참한 이 순간 나의 모호한 정체성이 불현듯 깨달아진다.


“유진 씨. 네 꿈이 뭐야?”


창밖으로 향한 시선을 겨우 끌어내려 사장을 보았다. 내 꿈이 뭐냐고? 내 꿈은, 없다. 없어서 대답하지 못했다.


“너 내 꿈이 뭔지 알아? 내 꿈은 우리 회사를 그룹으로 만드는 거야. 네 인생이 꿀 수 있는 꿈과는 아마 차원이 다를지도 모르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야. 하지만 여전히 꿈을 꾼다고. 아직도 목이 마르거든. 그런 게 뭔지는 알아? 유진 씨 볼 때마다 참 아쉬워. 내가 젊을 때는 유진 씨처럼 안일하게 살지 않았는데 말이야. 유진 씨는 복 받은 줄 알라고. 누가 유진 씨한테 이런 조언을 해주겠냔 말이야. 나 정도 되니까 하는 거지.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사장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만두겠다는 마음 여전해?”


“네.”


“그래? 그럼. 알았어. 나가봐. 경영지원본부장 다시 들어오라고 해.”


비서실에 돌아오자마자 경영지원본부장에게 내선전화를 걸어 사장이 찾는다고 말했다. 본부장은 사장실에서 그리 오래 있지 않았다. 그는 내 앞을 지나가며 소곤거렸다.


“오늘 채용공고 올린다.”


“무슨 채용공고?”


옆에 있던 김 과장이 물었다.


“채용공고라니요?”


박 과장도 내게 물었다.


“저 사표 썼어요.”


두 명의 수행비서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뭔 일이래?”


김 과장이 물었다.


“묻지 마세요.”


“사장님이 바로 오케이 하셨어?”


“네. 얘기 끝났어요.”


“회장님한테도 말씀드린 거야?”


맞다. 회장이 있었지.


“아뇨.”


“아이고. 섭섭해하시겠다. 나중에 따로 꼭 말씀드려.”


“네.”


박 과장은 말이 없었다. 그는 왠지 슬퍼 보였다.




한숨 돌리기 위해 탕비실에 들어갔더니 정 대리와 마 대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녕.”


인사무새 정 대리. 곧 끝이라 생각하니 반복되는 인사도 아주 듣기 싫진 않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마 대리는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뗐다.


“유진 씨는 쌍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저 쌍꺼풀 있어요.”


“아니, 좀 흐리멍덩해 보여서. 뒤트임 같은 것도 좀 해야 할 것 같고. 정 대리. 그렇지 않아? 유진 씨는 쌍꺼풀만 선명하면 더 예쁠 것 같은데.”


정 대리는 어깨만 들썩였다. 평소라면 한 귀로 듣고 나머지 한 귀로 흘려버렸을 것이지만, 오늘 나는 사표를 쓴 사람이다.


“마 대리님이야말로 쌍꺼풀 수술을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니, 내가 왜?”


"짝눈이시잖아요.”


"하하. 유진 씨, 말 험하게 하네."


어서 와. 타격은 처음이지?


“제 외모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남의 얼굴 지적하시기 전에 부지런히 거울 보세요.”


밖에서 내선전화벨 소리가 들려 자리로 돌아가 전화를 받았다.

탕비실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영업본부장의 내선전화였다.


“유진 씨.”


“네. 본부장님.”


“그만둔다면서요?”


“벌써 아셨어요?”


노트북 옆에 놓인 손거울을 들었다.


“아직 많이 남았다고 듣긴 했는데 그래도 퇴사한다니 섭섭하네요.”


왼눈과 오른눈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아, 네.”


“언제까지 일한다고 그랬죠?”


눈에 힘을 주고 다시 보았다.


“올해요.”


“퇴사 이유가 사장님이 일을 무지막지하게 시켜서 그렇다는데, 맞아요?”


두어 번 깜빡거렸다.


“아뇨.”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남은 시간 동안 잘 부탁해요.”


“네.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동기에게서 톡이 왔다.


[영업본부장 때문에 여기 소문 다 났어.]


누군가의 퇴사만큼 뒤에서 입방아 찧기 좋은 주제가 또 있을까.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나도 종종 어느 누군가의 퇴사를 가십으로 삼아 내 무료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으니까. 비서의 퇴사라. 그들에겐 한동안 꽤 맛있는 안줏거리가 될 것이다.

keyword
이전 10화무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