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탕비실에 들어가 차가운 물로 손을 씻었다.
아,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부모님이 나를 잘못 키운 거였네? 나는 실수한 게 아니라 실패했던 거네? 헛웃음이 나오는 와중 코가 시큰했다. 킬킬거리다 눈물이 고이던 와중 직원 몇이 탕비실에 들어왔다. 침을 꼴딱 삼켜 눈물을 참고 자리에 돌아와 앉으니 김 과장이 눈치 없게 물었다.
“왜 눈이 빨개. 내가 엄마 번호 가르쳐달라고 해서 그래?”
“네. 그러니까 제발 그냥 절 좀 내버려 두세요.”
회장은 예약되어 있던 호흡기 내과의 진료를 위해 3시에 퇴근했다. 사장은 사장실에 틀어박혀 수많은 보고를 받았고, 어마어마하게 밀려있던 전자결재의 재가를 하는 것에 하루의 시간을 다 썼다. 무려 저녁 8시까지. 그동안 나는 그에게 수차례 불려 가 다양하게 혼이 났다.
“영업팀은 영수증을 이렇게 처리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어? 세무조사 나와서 걸리면 지들이 책임진대?”
“생산팀은 이따위로 결재를 올리면 어떡하라는 거야, 어?”
“연구소는 일을 안 해?”
“너도 인마, 이런 접대비는 어? 내 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몇몇 개의 결재를 다시 올리고 타 부서에 피드백을 전달한 후, 구직 사이트에 등록된 이력서를 수정했다. 경력을 추가하고 자기소개서 몇 부분을 수정하던 중에 다섯 시부터 주차장에서 대기하던 박 과장이 기다리다 지쳐 사무실로 올라왔다.
“사장님 아직 안에 계세요?”
“네.”
“누가 들어갔어요?”
“아뇨. 보고는 다 받으셨고, 지금 계속 결재 중이세요.”
“많이 늦으시네요. 유진 씨, 오늘 혼 많이 났죠?”
“네.”
“너무 마음에 두지 말고 빨리 털어버리세요. 사람이 실수할 때도 있는 거지요. 저 보세요. 저는 유진 씨 마음 이해합니다.”
박 과장은 탕비실에 들어가서 생수병에 물을 가득 채워 나왔다.
“그럼 저는 밑에 다시 내려가 있을게요. 사장님 나오시면 전화해 주세요.”
“수고하셨어요.”
“네. 유진 씨도요.”
잠시 후, 사장이 나왔다. 이력서 넣을만한 곳을 둘러보던 나는 괜히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박 과장 밑에 있어?”
“네. 대기하고 있습니다.”
“간다.”
“내일 뵙겠습니다.”
사장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나는 회장실과 사장실을 대충 청소한 뒤 곧장 퇴근했다. 배가 고팠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금요일까지 어떻게 견딘담. 차에 타서 시동을 걸고 예열이 되기도 전에 출발했다. 출발한 지 10분 정도 되었나?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사장님.”
“야 이 새끼야! 너 미쳤어!!!”
어우씨, 깜짝이야. 사장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는 동안 갓길에 깜빡이를 켜고 차를 세웠다. 사장이 무엇 때문에 소리를 질러대는지 이해하기 위해 한참을 집중해 들어야 했다.
“네가 사장이야? 이거 완전히 미친 새끼 아니야? 네 맘대로 골프 시간 나눠주면서 갑질 행세하니까 좋아, 이 새끼야?”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뭘 몰라! 이 새끼야! 오늘 골프 시간 누구 잡아준 거야!”
“오늘 골프는, 아, 문 이사가 쓴다고 했습니다.”
“무슨 소릴 하고 자빠져 있는 거야? 술집 사장들이 쳤다잖아! 너 알았어, 몰랐어? 내가 다른 사람한테 술집 사장들이 우리 회원권으로 골프 치고 다닌다는 말을 전해 들어야겠어? 어? 술집 사장 접대하자고 우리가 회원권 산 거야!? 어? 그러라고 네가 비서하고 앉아있는 거야!? 어?”
사장만큼이나 나도 기가 막혔다. 뜬금없이 술집 사장이 웬 말이냐고.
“사장님. 저는 문 이사가 거래처 접대로 직접 쓴다고 들었습니다.”
“너 딱 기다려.”
사장이 전화를 끊었다. 영문을 모른 채 손발을 떨며 기다리던 중, 사장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너 왜 나한테 보고 안 했어? 보고를 안 하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니야!”
사장은 계속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사장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어쩐지 나는 더 침착해졌다.
“문 이사가 사장님께 직접 보고했다고 들었습니다.”
“보고는, 새끼야! 문 이사는 너한테 말했다는데!”
“저는 문 이사가 사장님께 직접 보고했다고 들었습니다.”
“너는 임원들이 너한테 굽실거리면서 골프 시간 받아가니까 아주 뭐라도 된 것 같았지? 어? 누가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고 골프시간 나눠주면서 기세등등하게 구는 게 재미있었지, 아주? 어?”
마구잡이로 소리를 질러대는 사장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문 이사가 거래처 접대로 쓰겠다고 예약을 요청했고, 나는 그가 요청한 대로 예약을 해줬다. 사장에게 보고를 했냐고 물으니 했다고 했다. 그 예약이 술집 사장들에게 갈 수도 있다는 걸 예측하지 못한 게 잘못인가. 아니면, 문 이사가 사장에게 보고 했다는 말을 의심하지 않은 게 잘못인가. 비서에겐 작정하고 속이는 사람의 속내도 알아채야 하는 선견도 필요하단 말인가.
“너 당장 사표 써!”
이 말을 끝으로 사장의 전화는 끊겼다. 나는 문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을 때까지 계속했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문 이사는 늘 전화를 칼 같이 받는 사람이었고, 간혹 가다 받지 못할 때에는 반드시 답을 보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문 이사와 연락이 되지 않자 차분했던 마음이 다시 요동치며 분노가 차올랐다.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부들부들 떨었다. 박 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유진 씨. 괜찮아요? 아까 옆에 있었는데 사장님이 너무 소리를 지르셔서 걱정됐어요.”
“안 괜찮아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모르겠어요.”
“사장님이 문 이사한테도 엄청 화내셨어요.”
“문 이사가 사장님 전화는 받았나 보죠? 제 전화는 안 받던데.”
“미안해서 그렇겠죠. 유진 씨. 빨리 잊어버리세요. 사장님 다혈질인 거 아시잖아요. 이 일도 금방 지나갑니다.”
“사표 쓸 거예요.”
“유진 씨. 그러지 말아요.”
“사장님이 사표 쓰라는데 써야죠. 제가 사장님 지시 안 따른 적 있던가요? 저 지금 운전 중이라. 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