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이사

7화

by 노이망


이튿날, 사장이 없는 금요일의 오후는 평화로웠다.


“유진, 안녕?”


마 대리와 절친한 정 대리가 탕비실에 들어가며 내게 인사했다. 참고로 정 대리는 인사 중독증에 걸려있다. 방금 인사가 오늘만 여섯 번째 인사였다.


“안녕하세요.”


나의 답 인사는 그녀의 등 뒤에서 허공에 울려 퍼졌다. 마 대리가 정 대리를 따라 탕비실에 들어갔다. 곧이어 둘의 찢어지는 대화 소리가 탕비실 문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나만큼이나 어지간히 한가한 모양이지.


나는 지금 회장의 주례사를 서른두 번째 수정하는 중이다. 회장은 일요일에 있을 홍 대리, 그러니까 본인 아들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 신경이 많이 쓰이는 듯했다. 수정한 주례사를 인쇄해서 회장실에 들어갔다. 회장은 돋보기안경을 쓰고 주례사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만년필을 들고 두어 부분을 또 수정하며 말했다.


“글자 한 포인트 크게.”


회장실을 나오자마자 자리로 뛰어가서 서른세 번째 수정을 했다. 제발 그게 마지막이었으면 했지만 나는 어느새 서른다섯 번째 수정한 주례사를 인쇄하고 있었다. 제발 마지막이어라. 제발, 제발, 제발. 회장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른다섯 번째 주례사를 읽고는 누런 치아 여섯 개가 보이도록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완벽하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회장실을 나왔다. 오늘처럼 한가한 금요일이 또 있을까. 정 대리가 마음 없는 인사만 남발하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하루일 텐데. 두 번째 서랍을 열어 노란 고무줄로 묶어놓은 명함 뭉치 하나를 꺼냈다. 오늘은 그동안 미뤄왔던 사장의 명함정리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려 한다.




“유진 씨!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어!? 문 이사님!”


복잡한 영문 명함을 연이어 입력하느라 문 이사가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문 이사는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상사다. 베트남 지사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일 년에 몇 번 보진 못한다. 그는 나를 볼 때마다 아주 잘해줬고 맛있는 먹을거리나 작은 선물도 꼭 챙겨줬다. 그가 작년에 왔을 때는 경영지원본부 사원들과 대리들에게 비싼 양곱창을 사주기도 했다. 그때 그가 우리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이 회사에서 너희 챙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다들 제 몫 챙기기 바쁘거든. 너희들끼리 모여서 대화 많이 하고 마음을 모으도록 해. 지금은 너희가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몇 년이 지나 과장 정도만 되면 주도권 잡을 수 있어. 그 주도권은 너희가 똘똘 뭉쳤을 때만 쥘 수 있는 거야. 나를 비롯한 임원들 다 썩어빠진 구식이야. 우리 회사는 세대교체가 되어야 해. 잘 배우고 잘 커서 회사를 이끌어가는 주역들이 되어야지.”


그 자리에 앉아있던 우리 모두 그를 좋아했고 존경했다.


“커피 좋아하지?”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 라테. 오예.


“감사해요. 잘 지내셨어요? 얼굴이 좋아 보이세요.”


“나야 뭐. 늘 잘 지내지. 사장님은?”


“부산 출장 가셨어요.”


문 이사는 비어 있는 박 과장 자리에 앉았다. 본사에는 그의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늘 비어 있는 김 과장 자리, 박 과장 자리에 앉곤 했다. 탕비실에서 실컷 떠들다 나온 마 대리와 정 대리가 내 옆에 앉아있는 문 이사를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이사님! 언제 오셨어요! 오늘은 뭐 사 오신 거 없어요?”


잠깐은 아주 시끄러울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손을 씻고 부스스한 머리끝을 손가락으로 빗으며 손에 묻어 있는 물기를 머리카락에 닦아냈다. 염색해야 하나. 머리끝을 한 뭉텅이 잡고 얼마나 상했는지 보았다. 좀 잘라야 할까. 거울에 가까이 다가가 얼굴 상태도 살폈다. 이마 앞으로 삐죽 나와 있는 잔머리를 옆 머리카락 사이에 쏙 집어넣었다. 거칠거칠한 아랫입술에서 각질을 잡아 뜯었다. 피가 났다. 아랫입술을 쪽쪽 빠는 중에 아까 그 두 여인이 화장실로 들어왔다. 얼른 여기서 나가야겠군.


“유진, 안녕?”


정 대리는 내게 또 인사했다.


“아까 인사했잖아요.”


내가 짓궂게 말하자 정 대리가 정색했다.


“왜. 만날 때마다 하면 안 돼?”


“되죠. 장난친 거예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정 대리가 다시 활짝 웃었다.


“잘 가. 안녕.”


인사는 하루에 한 번만 해야 된다는 사규가 있으면 좋겠다.




화장실에서 나와 비서실로 돌아가다가 문득 사장의 지시가 떠올랐다. 문 이사는 여전히 박 과장 자리에 앉아서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문 이사님. 사장님이 골프장 사용하는 거 꼭 보고 하라고 신신당부하셨거든요. 혹시 다음 주 월요일에 골드 CC 쓰시는 거 사장님께 말씀드렸어요?”


“어제 사장님이랑 통화했어. 나는 항상 보고하지. 왜? 누가 보고 안 했나 보네?”


“제가 못한 거죠, 뭐.”


“쓰는 사람이 보고해야지. 임원들도 참.”


문 이사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뒤적여 초콜릿 하나를 꺼냈다.


“초콜릿 좋아하지? 자.”


“고맙습니다.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내가 초콜릿을 뜯어먹는 동안 문 이사는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빙긋 웃으며 비서실로 돌아온 문 이사는 약속이 있다며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을 기약하고 사무실을 떠났다.




그게 내 퇴사 전 문 이사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렇게 믿음직스럽고 사람 좋은 모습으로 나를 안심시키던 문 이사가, 결국 내가 퇴사에 이르게 된 발단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

세상에 무조건 좋기만 한 사람도, 나쁘기만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은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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