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후 첫 해외출장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이었다. 이베리아 항공이 세비야 상공을 진입할 때 기내 방송에서 플라멩코가 흘러나왔다. 이전까지 한 순간에 사랑에 빠진다는 말 따위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저 검은 이베리아 반도의 적갈색 땅과 작렬하는 태양, 살아있는 것이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스페인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A는 스페인어 통역을 담당한 대학생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은 스페인 그 자체, 자주 웃고 친절했으며 세상에 대한 고민이나 걱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녀의 육체는 완벽하게 육감적이어서 당시만 해도 총각이었던 나를 매 순간 설레게 했다.
우리는 일과 후 가끔 만나 공짜로 나오는 올리브에 ‘크루즈 깜뽀’ 맥주를 마시곤 했는데, 작은 테이블을 마주 앉은 거리였으므로 A는 나의 뛰는 심장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해 질 녘의 세비야는 사뭇 몽환적이었다. 어느 순간 그녀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술집 이층 테라스에서 우리는 배경음악은커녕, 형식도 족보도 없는 이상한 춤을 추었다.
청바지를 입은 두 청춘 남녀의 이상한 막춤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에 없다. 우리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자주 끊어졌다가 이어지고, 다시 멈추기를 반복했으나, 눈빛은 쉼 없이 서로를 탐색하곤 했다.
어느 순간, A는 갑자기 버럭 목소리를 높여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로 몇 마디 내뱉고는 나가버렸다. 그녀의 모국어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알함브라’라는 한 단어, 네 음절의 고유명사였다.
세비야에서 그라나다로 가는 기차는 출발시간에서 4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열차가 연착하는 이유에 대한 역내 방송조차 없다. 이곳의 모든 시간은 예정시간이다. 모든 것이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어떤 일이든 생길 수 있다. 이곳은 스페인, 아니 안달루시아라고 불리는 이상한 곳이다.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오후 3시의 시에스타처럼 여전히 평온했다.
그라나다에 도착하고 궁전 앞까지 가서야 그곳에 입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굳게 닫힌 철문에는 시설보수 기간을 알리는 내용의 고지문이 영어와 스페인어로 나란히 붙어 있었다. 결국, 무슨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나는 알함브라 입구에서 홀연 길을 잃었다.
마을 언덕 너머로 해가 서서히 넘어가고 있다. 외로움과 성적 욕망을 분간할 수 없는 낯선 느낌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인근 카페에서 몇 조끼의 생맥주를 급하게 들이켠 후 A에게 전화를 걸었다. 알함브라에 들어가지 못했고 근처에서 혼자 생맥주를 마시고 있노라고. 근데 여긴 예의 공짜 올리브도 없어. 내가 생각해도 궁색한 말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미친 듯이 웃어대더니 아름다운 그라나다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걸 축하한다며 나를 위로했다. 근데 보름 동안 알함브라에 입장할 수 없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어? 수화기 너머 A는 다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곳은 안달루시아. 그들에게 알함브라는 명사가 아닌 형용사, 아니면 스페인어 이외로는 발음할 수 없는 비의이며 성소인가?
갑자기 스콜이 골목과 광장을 퍼붓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이 사람들에 뒤섞여 방사형으로 질주한다. 웨이터에게 한 잔을 더 주문하자, 빗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취기에 잠시 졸았는지 거짓말처럼, 환청처럼, 안달루시아의 플라멩코가 저 먼데로부터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뜻밖에 당하는 거절처럼 마음에 상처를 입힌 채 아프게 버려두는 그 목소리, 그러다가 갑자기 마음을 앗아가는 그 목소리. 화려하지만 무익한, 우리의 삶 위에 헐벗음과 외로움의 아라베스크 무늬를 그려놓는 그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