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는 늘 비보를 의도하고 있다. 막내 누님이었다. 10월 5일 새벽 6시 45분. 어머니가 죽었다. 누구는 돌아가셨다고 하고 누구는 눈을 감으셨다거나 운명하셨다고 말하지만 전부 에두른 표현이다. 죽었다는 말만큼 그 의미가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은 없다. 살아있지 않은 것은 결국 죽은 것이다.
아직 현직에 있는 형님 덕분에 장례식장은 이른 시간부터 조문객들로 붐볐다. 대형 조의 화분들이 속속 도착했고, 오후가 되자 그것들은 장례식장 입구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서 조문객들을 사열했다. 조카 둘 중 하나는 접수를 받고 엑셀에 소속과 이름, 조의 금액을 입력하였고, 다른 하나는 현금을 세어 부의함에 넣는 일을 하느라 분주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빈소를 지켰다. 20년 전에 당신 스스로 만드신 '젊은' 영정사진이 조문객을 굽어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다. 왜 모친은 그렇게 일찍 죽음을 준비했을까. 어떤 이는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재배를 했고, 어떤 이는 청주 한잔을 올리며 목례를 했다. 어떤 이는 바닥에 엎드려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친과 일면식도 없는 조문객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잠시 고인의 죽음을 애도한 후, 빈소 바로 옆 식당으로 옮겨 소주에 육개장과 편육을 곁들여 공복을 달랬다. 모두들 아직 살아있음을 안도하며 술과 떡을 서로에게 권했다. 맑고 화창한 10월의 가을날이었다.
향년 92세. 슬하에 3남 3녀를 두셨다. 3남 3녀들은 또 몇 남 몇 녀씩을 두었고 그중 몇은 또 혼인을 통해 많은 2세들을 생산했다. 나이 어린 증손자들이 식당과 빈소와 상주실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중 한 아이가 제상 위의 사탕을 먹고 싶어 했다. 초제가 끝난 뒤였으므로 그것 두세 개를 집어 녀석에게 건넸다. 녀석은 환호하며 물러났으나 뒤이어 다른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사탕은 금세 바닥이 났다. 나는 이 싱싱한 욕망과 철없는 삶의 관능에 잠시 목이 메었다.
사람들은 상주들에게 연신 소주를 권했고 그 술은 가끔 넘쳐 상복 소매를 적셨다. 일부 조문객은 술이 지나쳐 상주의 어깨를 치며 '호상이야 호상'을 반복해서 외쳤다.
사자에게 좋은 죽음이란 없다. 하지만 터무니없게도 어느 순간 삶이 죽음을 압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잠시나마 그럴 수 있기를 소망했다.
월요일. 장례식 마지막 날. 주말 이틀과 달리 새벽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승화원을 거쳐 장지인 추모원까지, 모든 장례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추모원 깊은 곳. 수령 50년이 넘은 큰 소나무 아래에 어머니의 분골을 묻었다.
노송 군목지 아래로 작은 실개천이 흐른다. 야트막한 언덕 이곳저곳에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가는 비에 산과 나무와 꽃들이 천천히 젖고 있다.
가난했고 고단했고 수고로왔던 무거운 생애, 이제 여기에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시라. 당신의 사후를 내가 이을 것이고 나의 사후를 아이들이 또 이을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있으라! 부디 살아있으라! 살지 않는 건 죽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