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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J Aug 17. 2024

시간, 소멸에의 약속

영화 '보이후드' 속 시간

시간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지만 이렇게 거칠고 투박하게 다룬 영화는 처음이다. 이 영화는 <미드나잇 인 파리>, <인터스텔라>처럼 현실의 물리법칙을 벗어나 시공간을 오가는 말랑말랑한 판타지가 아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는’ (happily ever after) 방식은 감독의 취향이 아니다. 그는 현실의 ‘진짜’ 시간을 화면에 담고 싶었다. 플롯도 반전도 없는 단순한 형식에 상영 시간도 2시간 40분이 넘는 장편, 영화 <보이후드 Boyhood>다. 


주인공은 메이슨 (엘라 콜트레인)이라는 한 사내아이, 그의 눈을 통해 6살부터 18살까지의 기간 동안 겪는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의 순간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메이슨과 두 살 터울 누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하지만, 부모 (에단 호크, 패트리샤 아퀘트)는 같은 시간 동안 늙어간다. 


성장과 노화에 걸리는 시간은 영화적 시간이 아닌 12년이라는 현실의 시간이다. 배우들은 매년 한 차례 만나 12년의 세월을 같이 촬영했다. 내용이라야 특별한 게 없다. 가족 식사, 여행, 생일 파티, 졸업식 등 누구나 겪는 삶의 순간순간들을 담았다. 히치콕이 ‘영화는 지루한 컷을 잘라낸 인생’이라고 말했을 때 이런 식의 영화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보이후드>는 별것 아닌 내러티브가 세련된 미학의 옷을 입고, 영상 테크닉이 갈수록 현란해지는 영화의 일반적인 추세에 반한다. 일견 평이하고 따분하며 무료한 영화처럼 보이나, 의외로 실험적이며 현대적이면서 성찰적이라는 평가가 더 많다. 


어떻게 보면 영화는 12년 동안 멈추지 않고 찍은 하나의 롱테이크 씬처럼 느껴진다. 조지 부시의 이라크 침공, 2005년 <해리 포터>가 출시되는 모습, 2009년 오바마 선거 캠페인, 메이슨의 폴더폰과 닌텐도 게임도 영화 속 한 장면에 녹아있다. 중간중간 ‘콜드플레이’, ‘아케이드 파이어’의 노래가 그때 그 시간 속에서 흐른다.


영화가 담아낸 긴 시선이 당도하는 곳은 어디일까? 어쩌면 감독은 시간이라는 ‘괴물’은 삶의 절정을 우회하고 삶의 지루함을 통과해 결국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알려진 명구 ‘카르페 디엠’ (Carpe Diem)조차 감독에게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순간을 잡아라’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메이슨이 말한다. ‘순간은 일정하다. 오히려 순간이 우리를 잡는다’. 시간에 의해 구속되고 정의되므로 우리는 결국 순간조차 주체적으로 잡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운명론자에 가까운 감독의 화법이다. 메이슨이 대학 기숙사로 떠나는 날, 이별의 말을 건네는 어머니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결혼하고 애 낳고 이혼하면서....

네가 난독증일까 애태웠던 일, 처음 자전거를 가르쳤던 추억...

그 뒤로 또 이혼하고 석사 학위 따고, 원하던 교수가 되고 사만다를 대학에 보내고, 너도 대학 보내고...

이제 뭐가 남았는지 알아? 내 장례식만 남았어.

난 그냥..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오래전 사는 게 힘들다고 여기저기 비명을 지르고 다닐 때 이 영화를 봤다. 이제 체념에 익숙한 나이가 되니 늙는 것이 육체뿐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육신과 더불어 온갖 마음의 정념도 같이 늙어가니, 그게 시간이 주는 유일한 위로이자 처방일지도 모르겠다. 


#보이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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