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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J Aug 29. 2024

말의 흠, 말의 결

‘슬픔’이라는 감정이 있다. 슬픔의 양상은 사뭇 다양해서 고통에 가까운 것도 있고, 엷고 맑은 것도 있다. 어떤 슬픔은 심지어 감미롭기까지 하다. 슬픔의 세목은 각각 개별적이고 스펙트럼 또한 넓다. ‘슬픔’이라는 단어 하나로 그 여린 감정의 미세한 결을 하나하나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였을까? 존 케닉 (John Koenig)의 신간 <슬픔에 이름 붙이기>는 어휘(언어)의 한계에 대해 걱정과 우려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 그저 즐겁다, 아름답다, 우울하다로 표현할 수 없는 모호한 감정들’,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작가는 이런 미세한 감정의 뉘앙스를 포착해, 그것들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이른바 ‘마음의 혼란을 언어의 질서로 꿰매는 감정 사전’이다.


이전에 플로베르의 <통상 관념 사전>이나 이외수의 <감성 사전> 같은 시도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기존에 존재하는 어휘를 자신의 스타일로 ‘재정의’하는 수준이었다. 존 케닉의 책에 언급된 단어들은 저자 스스로가 만든 ‘신조어’라는 점에서 이전과 구별되는 독창적인 언어학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재미 삼아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


- 엔드존드 endzoned (n)

원하는 것을 정확히 얻었지만,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공허한 기분


- 프로럭턴스 proluctance (n)

고대하던 무언가를 피하려는 역설적인 충동


- 수엔테이 suente (n)

누군가와 정말 친숙해진 나머지 아무 생각이나 감정의 억누름 없이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도 그와 한 공간에 있을 수 있는 상태


- 모틀헤디드 mottleheaded (a)

이상한 조합의 친구들, 가족 혹은 동료들과 함께 어울릴 때 불안감을 느끼는


이 단어가 실제로 사용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우다지 saudade, 휘게 hygge, 두엔데 duende, 우분트 ubuntu 등과 같은 단어들의 선례가 있다. 그것들 또한 애초 소수 집단 내에서만 통용되던 것들이었으나 사용 지역도 빈도수도 이제 제법 눈에 띄게 늘었다.


새로운 시도 자체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에게 어휘(언어)가 아직 부족하고, 필요한 단어는 계속 무한 확장해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이다. 마치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 등장하는 장소, 그 무한공간의 도서관을 연상시킨다.


어휘가 늘어나면 더 원활한 소통이 가능할까? 사람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이것 역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반대의 제안은 어떨까? 역으로 말(언어)의 수요를 줄여 비언어적 공간을 늘려가는 방식이다. 이것은 산문이 아닌 시의 방식이고, ‘점수’가 아닌 ‘돈오’의 방식이어서 오히려 난이도가 높다. 강도 높은 훈련이 필요할 수도, 그냥 저절로 습득되는 것일 수도 있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는 삽화 하나가 있다. ‘한 선비가 기녀를 사랑하였다.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제 집 정원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지새우며 기다린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났다.’


발설하는 순간 진실이 훼손되는 말이 있다. 반만 드러내고 나머지는 말줄임표로 흐리는 게 좋은 말도 있다. 간신히, 아주 간신히 힘들게 발음해야 겨우 전달되는 말이 있다. 너무 연약해서 쉽게 상하므로 혀끝에서만 맴도는 말도 있다. 해도 되지만 안 하면 더 좋은 말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을 때 가장 힘이 센 말도 있다.


말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이 소통의 방법이라면, 말의 비만을 줄이고 체중을 감량하는 것도 방법이다. 어제 그제 일이 아니다. 말을 하기에 말은 늘 지나치게 많고, 말을 하기에 말은 언제나 부족하다. 무슨 헛소리냐고? 오해하지 마시라. 말인즉슨 그렇다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존_케닉

#슬픔에_이름_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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