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첫 페이지 [아루쿠마]

2020. 06. 14

by 잠긴 생각들

주말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릴 거라고 하더니, 이번에도 일기예보가 완전히 틀려버렸어. 토요일과 일요일인 오늘 모두 종일 비가 내리지는 않았어. 하지만 습하기는 엄청 습하더라. 먹구름과 뭉게구름이 절반씩 미묘하게 섞인 하늘과 찌는 듯한 습기... 드디어 여름이 오고야 말았어.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름이 말이야.

나는 이 뜨거운 여름의 주말을 열심히 즐기면서 살고 있어. 그래서일까? 마치 중고등학생 때 내가 주로 가졌던 습관처럼 최근 주말 동안 휴대폰에 뜨는 카톡 알림을 무시하기도 해. 사람들과의 연락이 버겁거나 싫다는 건 아냐. 주말만은 자질구레한 일들을 다 잊고 온전한 여유를 즐기고 싶어. 그렇다고 휴대폰을 아예 만지지 않는 것도 아니지. 인스타 스토리를 통해 내가 먹는 음식, 내가 하는 운동 등을 공유하기 때문에, 한 번씩 확인하게 되는 카톡 아이콘 옆 열심히 쌓여가는 숫자가 마음을 불편하게 하긴 해. 급한 연락이 아닌 경우에 일요일 밤이 될 때까지도 제대로 답장을 하지 않기는 하지만... 하하...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봄과 여름 사이에서 내가 보내온 주말의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 그냥 내가 기억하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일단 최근에는 등산을 가는 일이 잦았어. 작년 이맘때쯤 너와 등산을 했었잖아. 나는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등산에 대한 흥미가 전혀 없었는데, 그 경험 이후로 봄에는 한 번씩 등산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리고 올해 봄이 되어 날씨가 풀리자마자 남자 친구와 등산을 갔지. 그때와 다른 산을 올랐지만 역시 등산은 자연을 구경하기에도 충분한 운동을 하기에도 좋은 활동이었어. 푸르게 변신한 나무와 자라나는 풀, 높게 뻗은 소나무와 맑은 뻐꾸기 소리에 힘든 줄도 모르고 단숨에 정상에 올랐어. 이후 다른 주말에도 세 번 정도 등산을 가곤 했어. 아침에 산에 오르기 시작해서 정상에 도착하면 오늘은 무슨 점심을 먹을까 생각하며 설레기도 했어. 한 번은 보리비빔밥, 한 번은 닭볶음탕, 또 한 번은 감자탕을 먹었어. 땀을 쫙 빼고 먹는 음식은 어떻게 그렇게 맛있는지, 글을 쓰는 지금도 군침이 돈다-

주말이나 다름없는 금요일에는 주로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어. 휴학을 했거나 졸업한 친구들이 주변에 많아지니, 1-2년 전보다 모두 각자의 일상을 사느라 더 바쁘잖아. 그래서 하나하나의 약속들이 전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져. 나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게 그만큼 나와의 관계에 애정을 베풀어준다는 느낌도 들고. 평일 내내 일하느라 녹초가 된 나는 금요일 오전쯤 되면 약속을 잡은 게 후회스럽다는 생각을 스치듯이 할 때도 있지만, 막상 약속 자리에 나가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어.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휴학생 후배와 와인을 마시면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속 시원히 털어놓기도 하고, 교육생으로 연구원을 출퇴근하는 친구와 단골 곱창집에 가서 배 터지게 맛있는 걸 먹기도 하고, 요즘 통 찍지 않는 셀카도 함께 찍어보면서 말이야. 얼마 전 큰 집으로 이사 간 친구네 집들이를 가기도 했지. 그 자리엔 너도 함께였고. 우리는 비가 많이 내리는 날 촌스러운 착장으로 만나 엠티라도 온 듯 이런저런 게임을 하며 많이 웃었지.

간단하게나마 글로 정리해보면서 지난 주말을 상기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네. 그런데 누가 뭐래도 주말의 가장 좋은 점은 남자 친구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거야. 평일에는 일을 하거나 약속이 있거나 운동을 하기 때문에 함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볼 시간이 부족해. 하루에 한 시간을 못 보는 날도 있으니... 주말이 되면 그제야 우리만의 편안하고 소소한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거지. 이렇게 말하면 친구들은 조금 서운하게 들으려나?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주말은 그래.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날이야.

별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야.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던 화장실을 청소하고 바닥을 닦고 깔끔해진 집에 아무렇게나 누워서 tv나 영화를 시청해. 이번 주에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틀어놓은 채로 남자 친구는 책을 읽고, 나는 남자 친구 다리에 기대어 영화를 보다가, 메모장을 꺼내서 색연필로 하찮은 그림을 그렸어. 그러다가 집 밥이 먹고 싶어 진 우리는 가까운 마트에서 장을 봐와서 김치찌개를 끓여먹었어. 요리에 소질이 없는 남자 친구는 내가 찌개를 끓일 동안 계란말이를 만들 계란을 열심히 휘저어 줬지. 그리고 갓 지은 밥에 김치를 얹고 한 술 뜨면, 둘 다 휘둥그레 눈을 뜨고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우는 거야. 얼마 전 마트에서 캐치볼을 사 왔는데, 이게 또 심심할 때 하면 너무 재밌어. 내가 생각보다 공을 잘 던지더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너랑도 공원에 산책을 가서 캐치볼을 하고 싶어.

이번 일기는 너무 tmi 대방출인가? 하지만 가끔은 이런 가벼운 글도 좋은 것 같아. 6월 들어서 일기를 한 번도 쓰지 못했는데, 오늘 이렇게 밀렸던 일기를 쓰는 것 같네. 아- 이제 겨우 한여름의 첫 페이지에 들어섰는데, 남은 여름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휴학생 신분의 마지막 계절, 여름을 마음껏 즐기고 싶어. 끝자락이자 여름이어서 나중에 회상해보면 더더욱 아름답게 왜곡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 우리 이번에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잖아. 그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함께 하면서 과분할 정도의 스물네 번째 여름을 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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