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6. 10
날씨가 부쩍 따뜻해졌네. 아니, 따뜻함을 넘어서 뜨거워. 올여름은 정말 뜨겁게 불타오를 건가 봐. 불타는 고구마가 될 걸 생각하면 두렵기도 기대되기도 하고 그렇다.
20대 중반에 들어서니까 건강 걱정이 부쩍 는 것 같아. 물론 실제로 내 체력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기도 하고. 예전에는 가벼운 감기에 자주 걸렸어도, 아무리 뛰어놀고 밤새 공부를 해도 지쳐 쓰러지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이제는 조금만 무리를 해도 몸 곳곳에 염증이 생기고 앓아누워버리니... 학생 때 제시간에 맞춰 먹었던 급식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 알겠어. 물론 너는 성실하게도 매일 집에서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 나는 아니잖아. 이런 체력으로 불타는 여름을 시작했다가 더위를 먹어서 쓰러지진 않을지 걱정이야. 갑자기 여기저기 탈이 생기는 너를 보면서도 건강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더더욱 드네. 사실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기 때문에 뭐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노력도 필요하겠지.
이틀 전에 삐약(가명)이랑 술을 마셨어. 나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술을 마신 거였어. 술이 들어가서 알딸딸한 기분, 그러면서도 들뜨는 기분, 편안한 분위기- 그냥 다 좋더라. 그간 내가 했던 쓸데없는 고민들이 그 순간만큼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어. 내가 미친듯한 파티 피플은 아니지만, 역시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깔깔대는 순간들이 정말 행복해. 물론 서로의 맘 속 깊은 고민들을 터놓고 함께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싫다는 건 아니야. 그것만큼 상대방의 내면에 깊이 침입할 수 있는 순간은 없으니까. 하지만 술을 마시고, 텐션이 올라가면 너와 내가 골머리를 앓아가며 눈물짓게 했던 모든 걱정거리들이 잠시 가벼워지는 느낌이라 참 좋아.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을 잘 못 자는 내가 아무 걱정 없이 곯아떨어지게 만드는 것도 술이고, 감정표현에 서툰 내가 애정을 고백하게 만드는 것도 술이지. 물론 술에 질질 이끌려 다니는 건 절대 안 되겠지만 역시 나는 술이 좋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이 좋다니... 내 주량이 원망스러워.
나는 사랑을 몰라.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글귀는 내 일기장 겉표지에 붙여져 있는, 백수린 작가의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에 나오는 문장이야. 창작과 비평 독서모임을 시작하면서 창비에서 봄호 책과 함께 여러 작가의 문장들을 담은 스티커를 보내왔는데, 그중에 저 글귀가 마음에 들어서 일기장에 붙인 거지. 내가 얼마나 사랑에 서툰지에 대해 생각했어. 살다 보면 그런 사람들을 종종 만나잖아. '아, 저 사람은 정말 사랑이 넘치는 사람 같다' 싶은 사람.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애인이 그렇고, 전 애인도 그랬어. 사람이 모난 부분도 없이, 그냥 옆에 있으면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말이야. 나는 항상 그런 사람들이 내어주는 편안한 그늘 아래서 쉬고 싶었어. 언제나 나 자신에게 가혹하기만 한 내가 그 아래서는 잠시나마 모든 걸 잊고 나를 좋아할 수 있었거든.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의 애정과 관심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어. 뭐랄까, 그런 애정을 받으면 마치 내가 뭔가 다른 타입의 사람을 흉내 내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렇지 않으면 그 애정은 곧 사라져 버리고 말 거라고 생각했어. 어렸을 때는 연애소설이나 멜로드라마 같은 것을 많이 보잖아? 그런 것에 나오는 연인관계처럼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부적절감과 낭패감이 나를 휘감았어. 게다가 언제나 나는 사랑에 빠져있는 내가 불안하게 느껴졌어. 아무것도 내 통제 하에 있지 않고, 뜻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까. 특히 내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나는 용납할 수가 없었지. 사랑을 시작하면 거침없이 그 사랑에 뛰어들어 헤엄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무서워서 계속 발만 담갔다 뺐다 하는 사람이 있잖아? 내가 바로 후자의 사람이었던 거지.
저 글귀는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야.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도 잘 모르겠으니까. 나는 얼마 되지 않는 내 평생을 나를 고문하는 방법만 연구하면서 살았던 것 같아. 자기 학대를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지. '너는 부족하니까 더 노력해서 성공해야 해', '너는 뚱뚱하니까 이만큼 살을 빼야 해(물론 이건 성장이라고 볼 수 없어)', '너는 가난하니까 좋은 대학에 입학해야 해' 이런 가혹한 생각들이 나를 채찍질했어. 스무 살 중반이 되고 나서야 점차 자기혐오로부터 벗어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온기를 나눠줄 수 있는 법을 배우고 있지만, 여전히 힘들어. 나는 지금까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언제나 사랑해주는 그늘 같은 존재가 아니라 상대방이 드리워준 그늘 아래에서 내가 필요할 때만 쉬었다가 갔던 것 같아. 그 편이 항상 더 쉬웠거든. 그래서 상대방이 나를 원하고 움켜쥐려 할 때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도망가곤 했어.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나는 더 이상 나의 필요를 채우기에 급급한 사랑이 아니라 서서히 서로를 알아가고 자신의 삶의 한 자리를 내어주는 사랑을, 스스로에게 가혹하지 않고 다정한 마음을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야. 물론 이번 여름은 정말 뜨거울 거고 나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함부로 다른 사람의 세계에 발을 담갔다가 화들짝 놀라는 일을 또다시 겪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제는 가혹한 나의 마음에서 도망치기 위해 여기저기 전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서 사랑하는 내 모습을 오롯이 즐겨보려고 해. 뜨거운 만큼 사랑스러운 여름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