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발걸음을 따라서 [아루쿠마]

by 잠긴 생각들

저번 주에 교환일기를 쓰지 못해서 한 주동안 어떤 글을 써볼까 더 신중하게 고민했어. 아이러니하게도 바빠지다 보니 머릿속에 오히려 많은 소재가 떠오르더라. 월요일 저녁에 삐약이랑 칵테일을 마시러 갔는데, 다양한 주제로 대화가 오가다 보니 글을 쓸 소재가 이것저것 떠올랐어. 취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양한 스타일의 옷이나 인테리어를 선호하는 나에 대해 쓰고 싶기도 했고,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삐약이와 함께 한 그 만남이 너무 꿀 같아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휴식하는 기분에 대해서 쓰고 싶기도 했어.






아쉽지만 다른 주제들은 제쳐두고, 최근 페미니스트로서의 내 마음에 또 한 번의 큰 불을 지핀 이 영화에 대해 먼저 말해볼까 해. 내 마음의 상태가 지금 이 영화에 가장 진심이거든. 어제 젠더의 사회학 수업으로 영화 서프러제트 를 봤어. 부끄럽게도 서프러제트의 발음이나 스펠링도 낯설었던 나인데, 최근에 영화를 봤던 경험 중에서 이 영화에 가장 많이 감정을 끌어다 쓴 것 같아. 그만큼 강렬하게 슬프고 분하고 감사했던 영화였어. 다 본 후에 울기도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얼굴로 파이집에 토익 스터디를 하러 갔을 정도야. 사실 이렇게 너무 몰입해서 힘들어지는 영화는 내 의지로 재생 버튼을 누르기가 힘든 만큼 이번 기회를 통해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어쨌든 모두가, 특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 꼭 봐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하니까.


주인공인 모드 와츠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어머니로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평생을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살아가다가 영화 전반에 걸쳐 각성하여 서프러제트가 되잖아. 겉으로 보이는 ‘평온’은 사실 온갖 차별로 점철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순응하고 살아가면 더 편한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참 아이러니해. 지금의 우리도 몰라서 평온했던 과거와 다르게 하루하루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현실을 똑바로 마주 보고 스스로 힘든 길을 택한 채 살고 있잖아. 심지어 모드 와츠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여성이기에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각자의 권리를 국가에 행사하는 것과 같이 기본권을 가진 ‘인간’으로 살지도 못했지.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은 누구나 처음에 그 현실을 인정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 나는 학창 시절부터 화장하고 꾸미는 걸 좋아하는 소녀였고, 내 주장은 숨기고 상대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이 배려라고 배워왔어. 그런 내 성격, 성향, 내 삶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지. 온전한 내 것이라고 믿었어. 우리 새내기 때 우리 과 페미니스트 언니들이 남학우들의 성차별적인 행동들에 대한 대자보를 붙였잖아. 그때는 언니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왜 굳이 큰 갈등을 만드는 걸까?’라고 생각했었어. 모드도 처음엔 나와 같았던 것 같아. 사소하고 짜증스러운 방식으로 만연해있는 성차별을 이해하지 못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모드가 우연히 창 유리를 깨뜨리는 바이올렛을 마주하고 도망갔을 때, 모드 역시 내가 언니들을 바라봤던 눈빛으로 바이올렛을 바라보며 ‘유난히 예민하고 폭력적인 여성’으로 정의했겠지. 현재 페미니스트를 대하는 세상의 시선처럼, 서프러제트를 향한 수많은 남성들의 조롱과 비난이 판치는 세상에서 창문을 깨고 물건을 불태우는 것만이 여성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는 사실을 단박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모드가 각성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공감의 눈물만 주룩주룩 흘렸어. 동시에 100년이 지난 지금조차 그 과정을 따라가며 공감의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이 답답했어. 모드가 사장인 테일러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매기를 발견하고서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그 표정이 생생해.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결심하는 계기였겠지. 다음 세대 여성들도 본인이 겪었던 차별의 현실을 똑같이 겪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을 거야. 내가 매일같이 터져 나오는 성범죄 기사를 읽을 때 그러한 것처럼. 결국 모드가 바이올렛 대신 연설을 하는 장면, 그때부터 눈물이 시작되었던 것 같아. 모드가 자신의 인생을 몇 마디로 요약해서 발언하잖아.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7살부터 공장에서 남성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힘든 일을 하며 남성보다 적은 월급을 받아온 현실에 대해서. 또 투표를 해 본 적이 없어 투표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겠으나 어쩌면 투표를 통해 인생을 다르게 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은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 되돌아보며 발언한 것이기에 더욱 진심으로 와 닿았어.

평온해 보였던 모드의 삶이 그 연설로 인해 한순간에 망가지는 걸 지켜보면서 정말 마음이 아팠어. 감옥에서 강제로 옷이 벗겨지거나 호스로 강제 식사를 당하는 야만적인 학대, 집에서 쫓겨나 자기 배로 낳은 아들이자 모드의 전부였던 조지를 잃는 것... 많은 걸 잃어가는 가혹한 현실에서도 모드가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이 살아온 부당한 삶을 깨달아버렸기 때문이겠지. 여성을 차별하는 모든 법을 만들고 서프러제트를 비꼬면서 여성들을 가스라이팅하는 남성들. 모드나 우리나 혹은 어떤 여성이라도 차별의 실태로 가득한 ‘평온해 보이는’ 이상한 세상을 알아버린 후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많은 희생이 따른다고 해도 본인만의 방식으로 여성인권을 위한 목소리를 내게 되지.

모드가 처음 경찰에게 잡혀 갔을 때 자신은 서프러제트가 아니라고 했을 때, 예전 내 모습이 오버랩되었어.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을 뿐 페미니스트까지는 아니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 하지만 모드가 극 중에서 깨달았던 것처럼, 또 내가 깨달은 것처럼 모든 인간이 특정 성별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기를 바라고, 특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의 성적 도구나 인형의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미 페미니스트지. 영화의 말미에서 모드가 에밀리의 죽음 이후 무작정 공장으로 찾아가 바이올렛의 딸인 매기를 데리고 나와서 호턴 부인의 집에 맡기는 장면 기억나? 그 장면은 이 이상한 세상에서 후대의 여성을 단 한 명이라도 데리고 나와야겠다는 모드의 의지로 보였어. 세상에 태어날 여자아이들이 본인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길 바라며 행동했던 서프러제트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세상에 살게 되었어. 그렇기에 나 또한 내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심지어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는, 여성을 향한 차별을 덜어내기 위해서 서프러제트, 그녀들의 발걸음을 따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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