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아내고 우리 내일로 가자 [녹마]

by 잠긴 생각들

조울에 늘 빠져 사는 내가 너의 글을 보니, 내 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어. 맞아, 네 말대로, 무기력과 불안이 몰려와서 숨을 못 쉴 것 같을 때 절대로 해야 하지 말아야 할 일 중 하나가 '깊이 파고들기'인 것 같아. 순간순간 그럴 때가 있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데이트를 마치고 난 직후에 전혀 행복하지 않을 때. 아침에 일어나 미지근한 물을 들이켜는데 물 잔을 든 내 손이 덜덜 떨릴 때. 양 손 가득 두툼한 전공책을 들고 어디론가 바삐 향하는 학생들을 카페 창밖으로 멍하니 보고 있을 때. 그리고 그놈의 SNS. 나 빼고 모두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구나, 나도 저렇게 소소하고 포근한 일상을 보내고 싶다- 인스타그램 속 수많은 피드를 보다 보면 어떨 때는 그들의 웃는 얼굴이 너무도 얄미워서 소심하지만 '좋아요'를 누르지 않아 버리기도 해. 이런 순간들 속에서 나는 내 몸에 아무 무게도 느껴지지 않아. 내 몸은 그냥 존재하고만 있고,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미칠 듯한 불안함 뿐이야. 그러고 보니 요즘 옷을 사고 싶지도, 뭔가 먹고 싶지도 않고 잠도 잘 안 오네. 정말 불안 빼고는 모든 감각을 상실해버린 걸까?

새소년의 '난춘(亂春)'을 자주 들어. 딱 요즘의 우리가 듣기에 좋은 곡 아니니? 내 개인 블로그에도 그 멋들어진 가사를 캡처해 올렸지만, 아무리 되뇌고 되뇌어도 질리지 않는 말들인 것 같아. 누군가 나에게 그런 위로를 건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나 봐. 그런데 한편으론 아무에게도 위로받고 싶지 않았어. 그럼 내 불안과 비참함이 쏟아져 나와서 결국 아름다웠던 잠깐의 순간마저도 물들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정체 모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거라고, 나뿐만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살아가. '적어도 불안 때문에 망가져 버리지는 말자', 이렇게. 그렇지만 자기 암시로는 역시 충분하지 않잖아? 그래서 '난춘'을 들을 때마다 자꾸 울컥울컥 하는 건가 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더 나은 미래를 그려봐. 나는 지금 잠시 길을 잃은 것뿐이야. 아니면 나중에 생각하면서 '그럴 때도 있었지'라고 할 또 다른 추억을 만들고 있는 거지. 오늘을 죽지 않고 살아냈다면 오늘과 내일의 사이에서 멈춰있지 말고 한 걸음이라도 살금살금 내디뎠으면 좋겠어.

내가 어제 애인이랑 카페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하나의 장난 섞인 놀이를 했어. 내가 인터뷰어, 애인이 인터뷰이가 돼서 먼 훗날에 애인이 원하는 분야에서 크게 성공했다고 치고 인터뷰를 하는 거지. 애인은 축구 코치 겸 스포츠 교육학과 박사······ 뭐 이런 설정이었어. 성공한 축구 코치인 애인이 '축구의 정석'이라는 제목으로 장장 116권에 걸친 책을 써낸 거야. 그 116권의 책에는 글만 빼곡하고, 제37권의 '축구 선수 더브라이너 전술 분석'에서 그의 뇌 CT 사진이 실린 것 빼고는 일절 사진이나 그림이 없어. 그리고 116권을 제외하고 부록도 11권이나 되는데, 크게 히트를 친 부록 마지막권에는 애인이 가슴골 공포증을 어떻게 극복했는지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실없이 웃으면서 이런 인터뷰 놀이를 하니까, 두렵기만 한 미래도 어쩐지 한결 가볍게 다가오더라. 맞아, 뭐든 불안해하는 나에 비해 애인은 미래를 비교적 낙관적으로 보는 편이었어. 항상 그런 애였지. 제법 괜찮은 대학교의 제법 괜찮은 과에 입학해놓고도 자신은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에 가겠다며 덜컥 반수를 결심할 때도 그랬고, 우쿨렐레를 배워보고 싶다고 한지 이틀도 안 돼서 진짜 우쿨렐레를 사서 연습할 때도 그랬고, 나는 언제나 의심했던 우리의 미래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없이 한결같이 똑같은 고백을 할 때도 그렇고. 진짜 '축구의 정석'이라는 책을 내기라도 한 마냥 웃으면서 질문에 대답하는 애인에 비해 나는 내가 원하는 미래 자체를 생각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인터뷰이 역할을 하지 못했지.

글을 더 잘 쓰고 싶은데 어젯밤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선잠을 자서 그런지 그저 멍하다. 약 두 시간 뒤면 너와 만날 거고, 우린 같이 강가에서 산책을 할 거야. 요즘 강가에 금계국이 많이도 폈더라. 토끼풀도 그렇고, 애기똥풀, 개망초, 장미도······. 그래서 산책하기가 참 좋아. 금계국이라고, 너도 분명 본 적 있을 거야. 노란 코스모스 같이 생긴 꽃. 초여름이나 한여름에 피는 꽃들의 이름은 되도록 알고 있고 싶어서 궁금한 꽃이 있을 때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거든. 금계국은 '초여름 노란 꽃'이라고 검색하니까 바로 나오더라. 꽃말이 '상쾌한 기분'이래. 생긴 것도 귀여운데 꽃말도 너무 귀엽지 않아? 여러 가지 꽃들이 싹둑 잘라져 잔뜩 뭉쳐있는 꽃다발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길가에 그냥 툭 피어있는 꽃들은 정말 좋아해. 이름을 알고 나서부터는 그 꽃이 더 예뻐 보이고 더 잘 보이고 그래.

오늘의 교환일기는 여기서 줄일 것 같네. 역시 대학 주변의 카페는 학생들이 많아서 좋다. 너를 기다리면서 나는 자기만족을 위해 쓰고 있는 자질구레한 소설을 끄적이고 있을 거야. 절대 아무에게도 보여주진 않겠지만 말이야. 이따 산책하면서 우리 이번에 올릴 팟캐스트는 어떤 주제로 할지 얘기해보자!



keyword
작가의 이전글상상은 짧게, 현재를 즐겨야지 그래야지 [아루쿠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