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하지만 나는 이런 사람이야 [녹마]

by 잠긴 생각들

지난 20일, 우리의 '줌술사(줌으로 술 마시는 사람들)' 파티를 기억하니?

코로나 때문에 연말 모임은 꿈도 못 꾸니까, 우리 둘을 포함해 여섯 명이서 언택트 연말 모임을 했지. 이런 방식으로 술을 마셔본 게 처음이라 조금 낯설어서 재밌게 놀 수 있을까 걱정을 했지만 어쨌든 무지 재미있었어, 그렇지? 마치 우리의 대면 만남이 그렇듯이 오디오가 겹치든 말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제 말만 하면서 나름대로 재밌게 술을 마셨지. 나는 오랜만에 술을 마시는 거라서 거실에 엄마가 있다는 사실도 거의 신경 쓰이지 않게 되더라. 오히려 집이니까 더 편안하게 놀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었던 것 같아.

나는 노트북이나 아이패드가 아니라 내 핸드폰으로 줌을 켠 거여서 SNS나 시간도 거의 확인하지 않고 놀아서 몇 시쯤에 파티가 끝났는지는 잘 모르겠어. 열두 시쯤이었을까?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니까 애들이 하나둘 나가기 시작했지. 나는 너무 아쉬워서 더 놀고 싶어 했고. 너도 그랬지.

내가 술을 마시면 필름이 잘 끊기잖아? 우리 둘만 남고 다 나가버린 그 공간에서, 어쩌다가 내가 갑자기 '서운함'을 토해냈는지 잘 기억이 안 나. 혹시 내가 어쩌다가 그 얘기를 시작한 건지 넌 기억나니? 아마 기억나겠지. 하지만 별로 알고 싶지는 않다.


SE-c90a714d-a88d-4dc0-954e-db770b490865.jpg 고독한 중술사 방


음······. 올해 너와 파이(가명)가 토익 스터디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기억나? 내가 "그럼 나도 끼워줘!"라고 했더니, 너희 둘과 내 수준이 맞지 않아서 안 된다는 얘기를 하며 거절했었지.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치렀던 모의 토익 시험에서 레벨 4를 받았었고, 너희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이미 다른 애들과 한 번 토익 스터디를 해 본 적이 있었어. 그런데 그 스터디가 흐지부지 끝나게 되면서, 나는 '어차피 토익 점수가 졸업 요건도 아니니까' 차일피일 토익 공부를 미루고 있는 시점이었고. 그래서 너희랑 함께 한다면 동기부여가 돼서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었어. 처음 거절을 당했을 땐, '그래, 나는 그래도 토익 공부를 해 본 사람이고 얘네는 아직 한 번도 안 해봤으니까 내가 끼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었지.

그 이후로 너는 한 달 전쯤에 토익 시험을 한 번 봤고. 나는 흐지부지 끝난 그 스터디 이후로는 한 번도 토익에 손 대지 않았고. 그래서 다시 한번 너에게 이제는 같이 해도 되지 않느냐고 물어봤어. 너는 괜찮긴 한데, 파이는 어떨지 모르겠다면서 확답은 해주지 않았어. 사실 처음 거절당했을 때도 내가 왜 거절당한 건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는데, 두 번째에도 확실한 거절은 아니지만 어쨌든 대답을 보류하니까 그때부터는 나도 서운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지.

그런데! 단연코 너희를 이해 못 할 정도로 '너무 많이' 서운한 건 아니었거든. 아무래도 파이도 같이 있을 때, 셋이 있을 때 얘기를 꺼내보고 되는지 안 되는지, 안 된다면 이유가 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 마음을 먹고 있을 때 내 애인에게 고민 상담을 하듯 말을 꺼냈지. 내가 어떤 상황이고, 어쩔 생각인지 말했어. 애인은 당연히 내 애인이니까, 내 편을 들어주면서 "그래, 나라도 서운하겠다. 다시 한번 걔네랑 얘기해봐."라고 말해줬어. 가벼운 서운함이 으레 그렇듯이, 그래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나니 그 서운함은 내 머릿속에서 잠깐 사라졌어.

그런데 어쩌다가 그 서운함이 하필 그 시점에 튀어나왔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마 술기운 때문이겠지? 어느샌가 나는 너와 파이한테 토익 스터디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고, 그러다가 어느새 울고 있었어. 절대 울 정도로 서운하지 않았는데. 그깟 토익 스터디가 뭐라고. 너는 지금까지 나의 합류를 거절한 이유를 설명해 줬고, 그러다가 애인에게는 이야기해놓고 자신에게는 왜 이야기하지 않았냐며 서운하다 했지. "그게 그 정도로 서운했는지 몰랐다"라며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는 너희의 모습을 보니까, 너무너무 창피해서 당장 숨어버리고 싶었어. "너만 괜찮다면 그럼 같이 하자"고 하는 너희에게, 나는 그 와중에도 자존심을 세우느라 덜컥 그러겠다고 하기 싫었어. 나도 끼워달라고 생떼를 쓰며 우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라서 너무 자존심이 상했거든. 그래서 일단 혼자 해보겠다며 또 발을 뺐고.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럼 대체 어쩌라는 거였을까 나 ^^)

어영부영 줌술사를 완전히 끝내고 술에 취해 잠들었는데, 다음 날 일어나서 내가 얼마나 창피해서 죽어버리고 싶었는지 몰라.

"녹마 진짜 XXX"

스스로 욕하면서 한숨을 쉬었어. 줌을 끄기 전 네가 카톡하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그냥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단톡방에도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고, 마치 모든 걸 잊은 것처럼 굴고 싶었어. 그렇지만 그건 너무 겁쟁이 같은 짓이라는 생각도 들었어. 그래서 한참이나 지난 다음 너에게 '미안했다'고 짧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지.

사실 이 이야기를 교환일기로 남겨놓고 싶지조차 않아. 그런데도 굳이 이렇게 쓰는 이유는, 그냥 이런 나를 인정하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나는 언제나 쿨한 사람이고 싶고, 서운함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고 싶지만, 어쨌든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걸. 스스로 너무 초라하고 소인배처럼 느껴지지만, 그렇게까지 느낄 일이 아니라고 계속 위로하는 중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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